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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D Jan 24. 2020

레이디 버드: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간격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Rady Bird)>


Do you like me?


“I wish that you liked me.”

“Of course, I love you.”

“But do you like me?”

 엄마는 자신의 딸이 최고의 모습으로 보이길 바란다. 그에 딸은 묻는다. 이게 내 최고의 버전이면? 순간 엄마는 할 말을 잃는다. 싫지만 사랑한다는 역설적인 것만 같은 말이 왜 그리도 이해가 됐는지 알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


 먼저 질문을 하나 떠올려 본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비슷한 것일까, 전혀 다른 것일까?


 막연히 좋아함이 깊어지면 사랑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위의 대사를 반복해 읊다 보면, 이내 좋아함이 가미되지 않은 사랑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좋은 느낌’, ‘즐거움’ 정도의 의미이다. 그리고 ‘사랑하다’는 ‘소중히 여기다’, ‘이해하고 돕다’, ‘이끌리다’ 정도의 의미가 있다. 또한 스탠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서는 사랑에는 '열정'과 '헌신' 그리고 '친밀감'의 요소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이건 참고로... 물론, 모든 사랑에 이 세 가지 조건이 꼭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니다.(두 가지 조건만 만족할 수도, 하나만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 요소 모두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단지,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만족되면 ‘성숙한 사랑’이라 칭할 수 있다는 거다.

 (+여기서 친밀감만 있다면 '좋아함'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이 이론에서의 좋아함은 우정에 속해있는 좋아함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 평소 쓰는 '좋아함'보다 좁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반면 좋아함은 어떤가? 꼭 이 세 가지 요건이 없더라도 충족될 수 있어 보인다.      


 나는 한동안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정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내릴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친구들에게 소소하게 앙케트를 했던 적이 있다. 감정에 대한 판단의 주체는 결국 '나'이기 때문에 한정된 '정의'보단 보편적 모양에 위배되지 않으며 개별적으로 조금씩 다른 '전형'을 찾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좋아함'에 대해 설명을 잘해주는 반면 또 누군가는 '사랑함'에 대해 설명을 더 잘해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좋아함'이 '사랑함'의 전 단계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사랑함'이 '좋아함'의 전 단계라고 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행복'에 사랑이 속한다 했고, 또 누군가는 '사랑'에 행복이 속한다 했다.  

 친구들의 답변들을 모으니,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차이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단지, 서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좋음'과 '사랑'이라는 긍정적 범주에 속하리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왕 앙케트를 했으니 스스로 결론은 내려봤다. 내 나름의 결론은, ‘좋다’는 건 나의 ‘취향’을 내포하는 것이고, ‘사랑’은 ‘취향’을 벗어나서 무언가에 대한 애정적인 ‘관심’이라는 것이다.

 다시 위의 대사로 돌아가 보자, 엄마는 자신의 딸이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 결국 크리스틴의 엄마는 그녀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지 않은 채 자신의 딸이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하는 ‘Do you like me?’라는 대사 이해가 갔다.     


*내 이름은 ‘레이디 버드’


 우리는 이상을 좇지만 현실에 발이 묶이곤 한다. 설령 내가 이상이라고 좇았던 것이 현실이 되더라도, 또 다른 현실이 나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현재라고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만 좇으려 발버둥 치다 보면 ‘현재’라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시야가 좁아질 거다. 이는 곧 자신의 이름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지도... 그래서 크리스틴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 '크리스틴'이 아닌 '레이디 버드'라 칭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현재는 텅 빈 과거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상과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혹은 어떤 이상은 현실이 되기 힘들기도 하다. 그러니 이상에만 묶인 사람이라면, 현재를 잘 살아가려 하는 게 어떤 이상보다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나 보니 그때가 좋았더라.’하며 과거를 회상하곤 한다. 지금은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과거의 향수는, 그 과거가 현재였을 때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들을 상정한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의 틀에만 지배된다면, 딱 그만큼의 삶 밖에 살지 못한다.

 크리스틴은 자신이 레이디 버드라 불리기 원했지만, 결국 어른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의 이름이 이만큼이나 예뻤는지 그땐 왜 몰랐을까 싶었던 것처럼.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대상의 과잉평가를 유도한다.


*세상을 발견하다(현실과 이상)


“‘상실(loss)’은 상실 이전의 완전한 충만의 상태를 전제한다. 대상은 이제 처음부터 없던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잃어버린 대상, 따라서 다시 되찾아야 할 대상으로 바뀐다. 흔히 과거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벽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오인되고, 나아가서 현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소외된, 즉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시간으로 인식된다. 현재는 잃어버린 과거를 욕망하게 된다.”

살림지식총서, 자크 라캉


 우리가 자주 불행해지는 까닭은 '비교'때문일 것이다. 요즘 같은 SNS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인을 보며 욕망하기도 하고, 타인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 행동은 결국 스스로 불행을 자처하게 만든다.


 자크 라캉은 '상실'에서 잃어버린 것을 욕망하지만 우리는 가끔씩 '결여'된 것을 욕망하기도 한다고 했다. 여기서 '상실'은 위의 말에도 쓰여있듯 이전의 완전한 충만의 상태를 전제하는 반면, '결여'는 이전에도 지금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재(결여)를 상실로 전환함으로 환상을 품게 된다.


 이러한 환상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얻지 못하는 것'만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에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지나 보니 그때가 좋았지.'의 말이 내포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주변의 기회들을 무시한 채, 자신의 생각 속 좁은 길로만 지나다니다 놓친 것들이 많았다는 걸 시사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모두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범주에서 스스로를 잘 돌보며 지금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찾, 차근히 현재를 걸어가며 자신의 미래까지 이어나가 만족스러운 현재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부디...


 크리스틴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추켜세우며 현재 자신을 '최고의 버전'으로 보고 싶어 했지만, 스스로를 똑바로 보지 못해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가지고자 했다. 이러한 괴리가 세상과 자신의 간격을 넓히고, 남들에게 쉽게 인정받을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럴만했으니까 그랬겠지. 원래 경험이 사람을 키우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과거를 후회하는 것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


by. UD(유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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