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렙+벳트+기멜
절기상 초복과 중복 사이에 있다.
여름 중 가장 무더운 날들을 지난다.
무더위와 에어컨 사이의 두 경계를 오간다.
동태탕의 뜨거움과
아이스커피스의 냉기를
한 몸으로 섭취해야 한다.
자전하는 내면의 세계와
공전하는 사회적 관계의
긴장을 한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마음을 지키는 구심력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심력의
하모니를 한 몸으로 지켜 가야 한다.
_ 김광영 자작시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 시편 119편의 말씀을 펼치게 된다.
119편의 제일 유명한 구절이 105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우리가 혼란과 어둠의 시간을 살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발견한다.
"인생 여정 한가운데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어두운 숲 속에 들어선 후에야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두운 숲에서 헤매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 첫 구절)
그리고, 한쪽 저 편에서 밝은 빛이 가느다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따라갔다.
이 시가 가진 교훈의 내용은 너무 깊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 두 마디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나, 우리는 이 시를 서두에 소개한 105절 말씀에서 명상할 수 있음이 우선 이 시를 읽는 사람이 1차적으로 집중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닌가 한다.
이 105절 말씀은 여기 이 시에 나타난 내용이 우리 인생이 걸어가는 길에 빛을 비추어주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캄캄한 길이나 어느 동굴을 지나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등불 한 개가 얼마나 크고 귀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 이 등불을 어두운 밤에 사용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다.
우리의 발의 등이 된다. 가까운 곳을 밝혀준다. 한 걸음 내딛게 한다. 그리고 길의 빛이 된다. 저 달빛과 별빛처럼 먼 곳의 여정까지 비추어 준다.
시편을 처음 읽는 이들이 가장 놀라는 시편이 119편일 것이다. 다른 시편들과 견주어 월등하게 길고, 주제 또 한 일관되며, (히브리어 본문을 본다면) 형식마저 따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얼핏 읽어 보기만 해도 이 시편을 지은 이가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서 얼마나 깊은 행복을 경험했는지(1〜2절), 또한 그 말씀이 보여 주는 현실을 얼마나 애타게 그리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또 얼마나 고심했는지, 습작을 거듭하면서 묵상하고 완성해 갔는지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성찰해 나갔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시인은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앞날의 다짐을 자신감 있게 진술한다.
시 119편은 시편 중에서만 아니라,성서 전체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1) 그 내용은 율법(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을 찬양한 시이며,
(2) 성서에서 가장 많은 절수를 가졌으며(176절),
(3) 이 시의 문학적인 특색으로 히브리시가 잘 쓰고 있는 알파벳식 시의 형식을 취했는데, 히브리 자모 22자로 시작하는 8줄의 시가 연속되어 있으며,
(숫자송: 1! 초라도 안 보이면 2! 이렇게 초조한데 3! 삼초는 어떻게 기다려 이야 이야 이야 이야 4! 사랑해 널 사랑해)
(4) 내용은 율법을 말하지만 “율법”올 다른 말로 표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증거/판단/율례/말씀/계명/법도/말씀
(5) 이 시 속에는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수치스러운 희비애락(喜悲哀樂) 등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교훈하고 있는 삶의 철학(지혜)을 가르치는 내용이 있고,
(6) 이 시는 어느 특정한 시 형태에 속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시의 모든 형태가 이 시 한 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구약학의 권위자 폰 라드(von Rad)는 이 시를 “지혜문학적인 오색찬란한 잠언의 목걸이” 같다
시편 119편은 시편 가운데서 가장 길고 가장 신중한 구조를 가진다. 아크로스틱(acrostic) 형식을 가진 시다. 첫 여덟 행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하고, 다음 여덟 행은 두 번째 알파벳으로 두 번째 알파벳으로 시작하며, 이렇게 계속하여서 22개의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총 176행의 시로 구성되었다.
이런 이합체 양식은 시편을 암기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그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온전성 혹은 완전성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즉 이합체 양식을 치밀하게 사용하며 율법을 주제로 삼는 시편 119편은 “율법의 완전성”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시편 119편의 시인은 각 8개의 구절들 속에 율법(토라)의 동의어로 여기는 단어 –증거, 판단, 율례, 말씀(다바르), 계명, 법도, 말씀(이므라)-를 적어도 6개는 사용한다. 각각 8개 구절로 형성된 22개 단락이 모두 ‘토라’의 유의어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토라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시편 119편이 시편 제5권의 중심에 놓여있다. 물리적인 중앙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과 기능 면에서 시편 5권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문은 두 가지다. 이처럼 176절로 구성된 장황한 시편이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둘째, 시편 119편을 이 자리에 놓은 최종 편집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시편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랍도록 깊은 세계, 경이롭고 무궁무진한 세계를 보여준다. 시편은 주님을 따라 광야로 나갔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셨던 신비로운 양식이다(토마스 머튼, ‘광야의 양식’ 중)
이 시편은 같은 주제에 대한 영광스럽고도 아주 길게 확장된 묵상인데, 알파벳 순서를 따른 이 시의 뼈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예로 특별히 풍성한 것은 각 행이 히브리어 ‘바브’로 시작하는 41-48절이다. 정말로 여기서 깨닫는 것은 토라가 새로운 종류의 ‘거룩한 공간’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순종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어디를 다니든지 토라는 마치 움직이는 성전, 움직이는 피난처와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1 〜8절 : 알렙 - 말씀을 따르는 이가 누리는 행복
말씀을 기리는 내용의 대서사시 119편을 시작하는 첫 단락(1~8절)은 모든구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첫 자음인 알렙으로 시작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절은 일반적인 선포이고. 5〜8절은 본격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으니 자신을 지켜 달라는 기본적인 간구다.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첫 두 구절인 1〜2절은 한편으로는 119편을 여는 구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편과 짝을 이루어 1 편부 터 119편까지의 시편 모음집을 지혜 시편으로 에워싸는 구실을 한다.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을 통해 행복을 찾는 사람의 심지 곧은 삶을 보여 준다. 곧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않고,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토라’의 ‘길(그데레크)을 걸어가며, 그분이 말씀하신 ‘법도’ (피쿠딤)를 잘 ‘지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느 한순간도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5〜8절은 개인적 차원에서 말씀과 관련된 간구와 다짐이 이어진다.
9〜16절 : 베트- 말씀 안에서 삶을 깨끗하게
모든 구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둘째 자음 베트로 시작하는 이 단락에서는 간구와 고백이 주를 이룬다. 10절과 12절은 간구다. 10절에서는 ‘계명’(”유미츠보드)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시기를, 12절에서는 ‘율례들’(마기후감)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한다.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 여호와여’라는 찬송을 간구의 근거로 든다. 이는 기도자의 자세와 하나님의 본성에 기대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은 고백이다. 9절에서는‘말씀(그다 바르)을 지키겠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젊은이(나아르)가 삶의 길(여기서 ‘젊은이’가 쓰인 것은 죄에 더 많이 노출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11절에서는‘말씀’(그소이므라)을 마음에 두었다고 고백하는데, 그 목적을 여호와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 그리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임을,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이 오직 말씀을 통해 계시하는 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3절은 좀 더 적극적인 고백이다. 곧 여호와의 입(꾸페)을 통해 계시된 모든‘규례들’(꼬미쉬)을 자기 입술(사파로 선포했다)고 고백한다. 이 구절은 공동체 차원에서 말씀에 대한 내적 깨달음이 외적 표현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14절에서는 다시 내면으로 돌아와서 그분의 ‘증거들(에두트)의 길을 즐거워했다고 고백한다.
반면 15절에서는 여호와의 ‘법도들’(피쿠담)과 ‘그분의 김’(오라흐 = 데레크)을 읊조리고 눈여겨보겠다고, 16절에서는 그분의 ‘율례들’(후킴)과 ‘말씀’(다바르)을 스스로 즐거워하고 잊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17〜24절 : 김 멜- 오직 말씀만이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17-18절은 하나님을 향한 바람을 표현하는 명령형 문장과 그 결과에 대한 시인이 다짐하는 청유형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7절에서 시인은 먼저 자신을 “잘 대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 이어지는 “내가 살 것입니다”라는 구절로 보아 이 요청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이 시인을 잘 대해 주셔야 하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탄원 시편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끌어내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8절에서 시인은 요청한다.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려 함이라고 한다. 이 낱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적과 연관된다. 이어지는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이 ‘놀라운 것’은 고난 상황에 대한 역설적 간구로 여길 수 있다. 곧 현실은 하나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함을 강조하는 표현 일 수 있다. 그런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와 그 놀라운 것을 찾고 있다.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19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나그네’(게르) 처지라고 고백하는데, 달리 말하면 전쟁 포로와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권리가 박탈된 극단적 상황인 셈이다.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의 계명을 ‘숨기지 마소서 “라고 하는데, 나그네 같은 시인의 처지를 고려할 때 이 또한 역설적 표현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고, 숨겨진 듯한 고난의 상황임을 암시한다.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0절에서 시인은 지치도록(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규례들을 사모한다고 고백한다. 상황만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인이 이토록 말씀을 붙드는 데는 신앙의 경험, 경건의 바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난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말씀을 붙드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시작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2-23절은 시인이 그 고난의 상황이 무엇인지 밝힌다. 비참한 자리에서 권력자들에게 비방과 멸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주의 증거들(개역개정: 교훈들) ‘율례들’을 놓지 않는다. 이것이 시인이 소유한 경건의 비결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24절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들’ 안에서 즐거움을 찾고 지혜를 얻는다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