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내가 초등학교 재학 당시 은근히 상처가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꼽자면 어느 날 내가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오면 같은 반 아이가 내 신발을 콱 지르밟고는 “첫 개시”라고 외치면서 내 속을 확 긁어놓는 것이었다. 한껏 들뜬 기분이 그야말로 단번에 팍 상했다. 그 이후로 내게는 무엇이 되었든 새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알게 모르게 생겨났다. 새로운 책을 사도, 새로운 신발을 사도, 심지어 새로운 휴대폰을 사도, 당장 쓰고 싶은 마음 없이 그냥 구석 어딘가에 고이 모셔두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내 소중한 새 물건을 함부로 더럽힐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이러한 마음의 상처가 아직 남아있었던 탓인지, <아저씨 우산>이라는 그림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저씨의 심리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책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아저씨의 행동은 내가 어릴 적 가졌던 무의식적 상처에서 나왔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긴 해도 이 아저씨에게는 어렸을 때 누군가가 자기 새 물건을 심하게 훼손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같은 반 친구든, 부모님이든, 친척이든 상관없다. 친하다는 이유로, 격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너무도 싫었으리라. 이것이 새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번졌고, 그리하여 자기 새 우산을 함부로 펴기가 저절로 꺼려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냥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렇지만 우산이 왜 있는가? 우산은 비를 막아주는 도구이다. 우산은 비가 올 때 펼쳐져서 비를 나 대신 맞아주어야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새 우산을 무슨 명품 가방처럼 그저 품에 품고 다니는 것은 우산의 본질과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아저씨는 그저 어떤 계기―그것이 쓰라린 경험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로 물건의 존재 이유를 등한시한다. 더 나아가 이제 민폐 수준까지 이른다. 멀쩡한 우산이 있는데도 비가 오면 남의 우산 밑에서 비를 피한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이 우산 좀 씌워달라고 부탁해도 자기 우산 펴주기가 꺼려진다. 내 것 하나 내놓기가 참으로 어렵다.
어디 우산뿐이겠는가? 사람에게는 자기가 꺼내놓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우선 재물이 있다. 허다한 재물이 몇몇 사람에게만 갇혀있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속칭 ‘돈맥경화증’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은 어느 정도 아래로 흘러가야 타인의 형편도 그나마 풀린다. 그 타인들이 흘러간 돈으로 자기 생계를 꾸릴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재물, 즉 돈의 본질과 역할이다. 이 과정이 수십 년간 이 땅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부의 양극화는 더 심해진다. 약간 결은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도 꺼내놓기 참 어려운 것이다.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산다. 하지만 서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곧추세우며 방어적 자세만 취한다. 이러니 내 상처가 치유될 기회조차 좀처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인간의 본질과 역할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까봐’ 카드놀이는 모임에 참여한 이들에게 자신이 꺼내놓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나름 꽤 괜찮았던 시도였다. ‘아플까 봐’, ‘죽을까 봐’, ‘가난해질까 봐’ 등등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좀먹는 염려가 참 많은데 그 염려를 솔직히 밝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들어주고, 이해하면서, 공감해 주는 광경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렇듯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나눠야만 우리 일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새 우산을 적시기 싫어서 늘 자기 품에 끌어안고만 살던 아저씨가 지나가던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이 열려서 우산을 폈듯이, ‘까봐’ 카드놀이가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해당하겠지만).
요컨대, 내가 가진 것―그것이 보물이든 상처이든 간에―을 가둬놓지 말고 흐르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더 유의미해지리라.
글쓴이_ 마을활동가 유현대(그림책수업 참여자)
(사노요코 '아저씨우산' 유튜브 컨텐츠 소개)
https://youtu.be/GVMc9a9jMPA?si=LjdwBmTl7QP3cI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