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6.
마르틴부버가 21세기를 산다면, 어떤 주제의 책을 적을 것같은가?
If Martin Buber lived in the 21st century, what subject would he write about?
Martin Buber가 21세기에 살았다면 무엇에 대해 썼을지 확실히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의 글은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를 고려할 때 현대 시대의 인간 관계에 대한 기술의 영향에 대해 글을 쓸 가능성이 있습니다.
Buber의 철학은 진정한 연결과 이해는 다른 존재와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에 중점을 둡니다. 기술과 소셜 미디어가 어디에나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도구가 타인과의 관계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려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Buber는 또한 인공 지능 발전의 윤리적 의미와 이러한 기술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할 가능성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AI가 더욱 정교해지고 우리 삶에 통합됨에 따라 이러한 상호 작용에 어떻게 존중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반적으로 부버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인간 관계의 본질,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의 중요성, 창작과 상호 작용에 수반되는 윤리적 고려 등 그의 철학의 중심 주제를 계속 탐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망(展望)으로서의 부버 사상의 이해와 적용
Ⅰ. 서론
Ⅱ. 근원어와 대화관계
Ⅲ.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Ⅳ. 사이존재로서의 인간
Ⅴ. 하시디즘과 유토피아 사회주의
Ⅵ. 결론
Ⅰ. 서론
『인간의 문제』의 ‘전망’에서 제기한 부버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조류 ‘사이’인간과, 공동체주의는 부버의 다른 책에서 더 심도 깊게 연결되어진다. 마르틴 부버는 제3의 조류로서는-그것은 인간학적 문제에 깊이 관여한 것이다- 인간을 고립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국가 및 사회와의 관련 하에서 취급한 것들, 『사람과 사람사이』, 『유토피아 사회주의』, 『신의 일식』 등에서 확장되어 간다.
부버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시대는 사회의 구조를 파괴한 것으로 본다. 기계를 장악하고 기계의 도움으로 사회를 장악하기에 이른 자본주의는 인간을 개인으로만 상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 스스로 발생시킨 세계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보다 더 강하고, 인간으로부터 자유롭다. 인간은 골렘을 옭아매고 해를 끼치지 못하게 만드는 말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렇듯 우리시대는 인간영혼의 좌절을 세 영역에서 차례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부버는 이러한 우리시대를 진단하기를 ‘신의 일식(日蝕)Gottesfinsternis’의 시대라고 본다. 현대성과 물질성 과학주의 등으로 신성이 일식처럼 가리워져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일식은 태양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지 태양 그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신은 지금도 암흑의 벽 뒤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이라는 이름을 파기할 수는 있어도, 그 버려진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신은 영원의 빛으로 살아있다. 이러한 신의 일식은 인간이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먼저 우리는 『나와 너』에서 나타나는 근원어로서의 핵심 용어와 부버의 철학을 이해하면서 그의 전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근원어와 대화관계
‘나와 너’는 관계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상호성과 직접성, 현존성, 그리고 강렬함과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만 인간성과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나’ 혹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정신은 ‘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사이’에 있다. 나아가서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너’에게 응답하기 위해서 사람은 그의 존재 전체를 바쳐서 관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
‘나와 너’와는 대조적으로 ‘나와 그것’은 조정과 이용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인간 사이(between him)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within a man)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상호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와 그것’은 주체로서 대상에,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간접적인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은 부버로 하여금 “대화의 삶”과“독백의 삶” 사이의 구별로 나아가게 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관계의 근원어로서 인간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 관계는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너’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적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과 세계, 인간과 신의 관계의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며 참된 공동체의 근원어도 ‘나와 너’가 발해지는 곳에서만 출현한다.
‘나와 너’의 관계가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인간과 인간은 전 인격적인 존재로 관계할 때 실제적인 ‘나와 너’의 만남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와 너’의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을 넣어서 마주칠 때 진정한 ‘너’가 되며 그 때가 바로 진정한 대화관계가 성립한다. 부버의 사상은 이렇게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가기를 요청함으로 비인격화된 지식중심적 교육환경에 문제성을 제기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한 주체는 다른 주체를 만난다. “너라는 말이 사용될 때 화자는 아무것도 자신의 객체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상호의 삶을 같이 나누는, 자신과 같은 주체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삶은 참된 만남이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그 둘은 차등적 관계가 있는 반면, ‘나’와 ‘너’의 관계는 동격의 두 독특한 존재의 대등관계이다. 그 때의 ‘나’는 진정한 나이다.
부버는 ‘나와 너’의 대화관계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가면이나 체면치레나 가식이나 체하는 일 없이, 심지어는 말하지 않고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서로 통하는 관계를 말한다. 독일어에는 ‘너’ 혹은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Du’와 ‘Sie’가 있는데, Du는 친밀한 사람들끼리 쓰는 것이고, Sie는 공식적, 외교적인 관계에서 쓰이는 것이다.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나-너’관계가 한 번 성립되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너-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넘나든다. 또 의식으로나 억지로 ‘너-너’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너’는 다시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결국 ‘나-그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열어 놓고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너’의 인격적 관계는 경험을 통해서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Ⅲ.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부버는 『인간의 문제』 ‘전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주의가 단지 인간의 한 부분만을 파악한다면, 집단주의도 단지 인간을 부분으로서 파악한다. 그 두 가지 모두는 인간의 전체성까지, 전체로서의 인간까지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 개인주의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만 보고, 집단주의는 인간 일반을 보지 못하고 단지 ‘사회’만을 볼 뿐이다. 전자에서 인간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후자에서 인간의 얼굴은 가려져 있다.
인간적 인격체는 마치 사생아가 버려지는 것처럼 그리고 황량한 인간 세계의 중심에서 홀로 고립된 인간처럼 자신을 자연에서 내버려진 인간으로서 느낀다. 새롭고 굉장한 상태를 인식하려는 정신의 첫 번째 반응은 현대의 개인주의이고, 두 번째 반응은 현대의 집단주의이다.
개인주의에서 인간의 인격체는 삶의 체계에 대한 방어 성곽을 짓고자 하며, 그 성곽 속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설명하는 이념을 원한다. 자연에서 버려진 채로 인간은 세계에 어떤 다른 존재도 없다는 특별히 과격한 방식 속에서만 개인이 된다. 현대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허구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허구는 주어진 상황을 실제적으로 극복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 개인주의의 이런 특성 앞에서 개인주의는 좌절하고 만다.
두 번째 반응인 집단주의는 본질상 첫 번째 반응의 좌절에 뒤따라 나온다. 여기서 인간의 인격은 자신을 현대의 강력한 집단 형성체 중 하나 속에 완전히 파묻혀서 고독의 운명을 피하려고 한다. 이 파묻힘이 더욱더 강력하고, 빈틈이 없어지고, 성능이 우수할수록 더욱 더 인간의 인격은 집 없는 것의 두 가지 형식, 즉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두 형식에서 자신이 구제받는 것을 느낀다. 집단은 총체적 안전성을 차청해서 떠맡는다. 여기에 허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두터운 현실성이 지배하며 그래서 일반적인 것 자체가 실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현대 집단주의는 허구적이다. 인간 군중을 포함하고 있는 신뢰할 만한 기능을 가진 ‘전체’에 대한 인간의 접촉이 실행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접촉이 아니다. 집단 속에 있는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인간이 아니다. 여기서 인간의 고독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고독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려고 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은 심연에서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작용하여 남몰래 전체성으로 떠오르고, 그 전체성은 환상을 분산시킴으로써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대 집단주의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만남 앞에서 직면하게 되는 마지막 장벽이다.
허구와 환상이 끝난 뒤에 인간의 가능하고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과의 만남은 오직 공동 인간과 개별자의 만남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자신을 그 만남으로써 실현해야 한다.
개인주의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에 반하여 집단주의는 비록 여기저기에 몇몇 해체의 징후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 발전의 정점에 서 있다. 여기서 관계에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격체의 봉기 외에 어떤 다른 길은 없다.
이 인식의 첫 번째 걸음은 우리 시대의 사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짓된 대안, 즉 ‘개인주의 또는 집단주의’라는 대안을 때려 부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인식의 첫 번째 물음은 진정한 제3의 대안에 대한 물음이어야 한다.
삶과 사유는 여기서 같은 문제의식으로 서 있다. 삶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한 것처럼, 사유도 개인주의적 인간학과 집단주의적 사회학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진실한 제3의 대안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여기서 또한 그 길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인간 실존의 기초적 사태들은 단독자 자체도 전체성 자체도 아니다. 양자가 그 자체로 고찰된다면 단지 강력한 추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와 생명력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한, 개별자는 실존의 사태이다. 전체성이 생명력 있는 관계의 통일성에 의해 세워지는 한, 전체성은 실존의 사태이다. 인간 실존의 기본적 사태는 인간과 함께 있는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실존과 더불어 규정되었으나 개념적으로 아직 파악되지 않은 영역을 나는 사이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비록 사이의 영역이 매우 상이 할 정도로 현실화될지라도, 사이의 영역은 인간 현실의 원초적 범주이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제3의 대안이 시작되어야만 한다.
사이는 보조 구조가 아니라 사이인간이 발생하는 현실적인 장소이자 받침대이다. 사이는 특별한 주목을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이는 개인적 영혼과 환경에 관한 차이에 대해 어떤 소박한 일관성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만남에 따라서 매번 새롭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오페라 하우스에서 동일한 순수성과 집중력을 가지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두 명의 서로 낯선 청중 사이에서 결코 감지할 수 없지만 기본적인 대화의 관계가 통하는 경우는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불이 켜지면 그 관계는 바로 사라진다.
대화론적인 상황은 오직 존재론적으로만 접근하여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실존의 존재성(Ontik)이나 두 명의 개인적 실존의 존재성에서 아니고, 두 명을 초월한, 두 명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에서만 파악 할 수 있다. 대화론의 가장 강력한 순간에 사건의 주위를 원으로 그리는 막대기가 개인이나 사회에 있지 않고 제3자에게 있다는 사실은 오인할 여지없이 극히 명백하다. 주관성의 저편이나 객관성의 이편에, 즉 나와 너가 만나는 좁은 산마루 위의 사이의 영역이 있다.
고릴라는 개체(Individumm)이고,, 흰개미 군락은 집단이다. 그러나 나와 너는 우리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욱이 나는 너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인간’이라는 대상을 고찰하는 것에서 인간학과 사회학을 포함하는 인간에 관한 철학적 학문이 시작돼야만 한다. 만일 네가 단독자 자체를 고찰한다면, 너는 인간에 관하여 마찬가지로 오직 우리가 달에 관해 보는 것만큼 그만큼 볼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인간만이 비로소 둥그런 영상을 본다. 만일 네가 전체성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너는 우리가 은하계를 보는 것만큼 그 만큼이나 인간에 관해 볼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인간만이 비로소 윤곽의 형태를 본다. 만일 우리가 인간을 그의 대화론 속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한 사람의 만남이 매번 실현되고 인식되는 본질로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모든 ‘나-너’관계가 ‘나-그것’으로 변화되어 버린 상황에서 ‘나-너’는 목적과 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런 위험은 우리 모두가 바로 오늘의 사회 속에서, 말하자면 개인주의와 공이를 주의를 토대로 시장과 도구적인 이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 안에서 똑같이 체험하고 있다. 단일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지향하도록 하여 모든 인간을 전체화시키며 닦달하고 있다. 부버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삶의 발전에서 ‘나-너’ 함께 있음의 관계 의식의 감소와 획일적 사회의 우세에 있다. 그 당시 그는 자본주의적 사회의 특징을 가진 부르주아적 산업 사회와 도시화로 인한 익명성이 비인격화의 과정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부버가 구별했던 인격과 개별 존재의 구분으로 보면, 개별 존재는 ‘그것’과의 관계에서 소유와 점유를 위한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인류가 개인주의를 자기 존재의 이데올로기로 더욱 깊이 받아 들일수록 자아는 더욱 비현실성(Umwirklichkeit)에 빠지게 되고 인간의 인격은 비현세적, 은혜적, 부당한 실존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버는 우리 시대의 병은 바로 역사 과학화하는 사고의 증세라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의 관점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아 그 관점에서 주어진 특정한 미래적 목표에다 방향을 지우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정한 인간의 사회적인 상호작용과 사회적인 관계의 의미를 부차적으로 다룬다. 말하자면 상호작용의 역할을 도외시 하고 있다.
Ⅳ. 사이존재로서의 인간
부버에게 언어는 단순히 의사전달 수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인간의 존재방식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분명 부버의 주장은 옳다. 단지 문제는 ‘나와 너’의 대화와 사람의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실현한다고 하는데, 이때 정확하게 ‘사이’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부버는 대화적 관계를 중시 여기는데, 그것은 주관을 초월함으로써 객관은 ‘나와 너’가 만나는 좁은 능선(narrow ridge)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거기에 ‘사이’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즉 부버는 인간 사이의 영역이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타자를 객체로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사건의 파트너로서 관계할 때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한 사람이 타자와 직면(confronting)하는 영역을 뜻하는데,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이해되는 과정을 대화라고 지칭한다.
부버는 “인간존재의 기본적 요건은 사람과 사람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본다. 이러한 관계의 영역을 ‘사이’라고 부른다. 이 ‘사이’가 인간의 사건이 생기는 참 장소가 된다. 이러한 사이의 영역에서만이 인간의 전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타자와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는 관점에서 일간을 볼 때 “사람은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부버에 의하면 기존의 철학적 인간학을 주장하는 어떤 사상가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주의도 아니고 집단주의도 아닌, 나의 자유와 개성을 확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려한 것이 부버의 의도였고, 이를 정의한 개념이 바로 ‘사이 존재’이다. ‘사이 존재’로서의 ‘나’는 홀로 고독하게 자기반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이데거나 키르케고르가 주장하는 ‘일반인’과 ‘군중’은 결코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내 존재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즉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현실을 피하거나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세계를 벗어난 나의 존재는 무의미할 뿐이다.
Ⅴ. 하시디즘과 유토피아 사회주의
부버를 이해하기 위해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씨드’라는 단어는 ‘경건자’를 뜻한다. 하시디즘은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아주 열악한 여건 속에서 사는 자들을 위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운 종교적 삶의 형태를 만들어 전파하는, 당시 유대교를 쇄신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이다. 이 운동의 핵심사상은 이렇게 표현된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이 깃들여 있다. 각 사물은 하나님으로 향하는 입구를 제공한다.”
이 신비주의의 광채는 고난과 역경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져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다가도 다시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이 신비주의는 항상 밝고 빛나고 감미로운 향기를 은은하게 자아내는 오래된 고목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라는 마르틴 부버의 말은 신비주의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부버는 무아적이고 피안적인 신비적 종교성으로부터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공동체 세우기에 초점을 맞추는 현세적으로 영성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나치 등장하기 전인 1920년대에 이미 일어났다. 이런 전환에 대한 부버의 설명은 신랄하고 사려 깊다. 이것은 그 개별성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를 갖는 특별한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부버는 이것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부버의 『인간의 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물음으로 랍비 코쓰크는 마침 그를 찾아온 선비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손님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런 질문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온통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데.”
그러자 랍비는 자신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머무십니다.”
부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보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 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정말 서 있고 살아있고 참 삶을 살고있는 그곳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피조물계에서도 영적 본질이 구현되도록 돕는다면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신적 현존의 거처가 마련된다고 본다.
부버는 모든 종교사회주의자들과 같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수용하는 반면에 마르크스의 반(反)종교적 편견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부버는 모든 종교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제시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기소외론’, 인간이 하나의 ‘물건’이 된다는 이론, 양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노동력의 일부가 된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부버는 모든 종교사회사회주의자들과 같이 특정한 집단, 즉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승리, 이 승리에 따르는 새로운 제도들이 인간 본성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신념을 거부하였다. 부버가 볼 때,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신념은 <나-그것>에 따르는 사고이며, 그 결과 ‘당신(Thou)’의 상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대승을 거두었을 때, 유토피아사회주의 또는 유토피아주의는 지성인들의 탈선된 박물관으로 보내져야 할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경험된 소비에트 유니온의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수많은 실패와 여러 가지 격렬한 낭패 그리고 “패망한 신”과 더불어 가지게 되는 환멸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부버가 표현한 것과 같이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즉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사회주의가 “미래사회의 조직을 위해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부버는 협동조합적 생활의 한 유형으로 더불어 곧바로 친근하게 되었는데-크부차(Kvutza)의 협동조합적 생활이 그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 이주지 중의 한공동체 였다.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추방된 한 피난민으로서, 부버가 1938년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기회는 얻어 크부차, 즉 그의 이면, 그리고 유토피아사상의 전 흐름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에 관해 연구하였다. 비록 성공으로 간주할 수 있기 전에 달성되어야 할 것이 많이 숨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실패의 시험”에 대한 부버의 지식이 그로 하여금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저술토록 자극한 것이 사실이다.
조셉블라시(Joseph Blasi)의 The Communal Experience of the Kibbutz에 의하면 키부츠운동은 270개 공동체의 12만 인구로 구성되었다. 키부츠(Kibbutz)라는 말은 히브리어 Kvutzah에서 왔으며 뜻은 그룹은 가리킨다. 처음 키부츠(Kibbutz)는 1909년에 창성된 하나의 시골 자치단체였다. 현재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약 3.66퍼센트를 차지한다. 키부츠(Kibbutz)의 내용은 수많은 민주적 지회들에 의해 지축을 이룬 경제적 협동과 사회적 이해에 근거한 작은 공동체이다. 이 단체는 어떤 개인에게 단체의 지도적 직분을 맡기지 않는다.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보살피고 교육한다. 비타협적인 사람들끼리 결탁하여 빚은 충돌없이 공동체 안의 모든 회원에게 관심을 갖도록 한다.
노동을 중요시 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웃 공동체와 협동하는 이들이 갖는 경제적 관심은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 풍요에 대한 태도, 생활표준의 단순화와 제한, 산업화의 도전이다. 이들은 범죄 없는 사회에서 산다. 이 공동체가 생긴 이래 Vatik에서는 중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 살인, 자살은 물론 폭력으로 인한 부상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범죄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들면, 모든 명에 차이와 불균등이 없다. 모든 회원은 다 일한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이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사회적 압력은 범죄를 예방한다. 부버는 정치원리가 배제되고 사회원리가 지배하는 실험된 공동체 중의 공동체를 키부츠(Kibbutz)로 든다.
부버는 말한다. 최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 중앙권력은 혹은 공동체적 바탕위에서 살고 생산하는 지방과 도시의 노동자들의 사회적 단위는, 그리고 대표 단체는 어찌될 것인가? 후자의 경우, 개조된 국가기관은 단지 조정과 관리의 기능만 하게 된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화의 성장은 이러한 결과에 달려 있다. 다음의 원칙에 대한 결정이 문제가 된다. 연합의 연합으로서의 사회구조의 갱신과 통일기능에로의 국가의 기능의 축소, 전능국가에 의한 무정형의 사회의 흡수, 사회주의적 다원주의 또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단일정부주의, 변화하는 조건에 의해 하루하루 새롭게 음미된 집단적 자유와 전체 질서와의 정당한 조화, 또는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강경히 주장된 자유의 영역을 위해 무정기간 지워진 절대적 질서 등. 사회주의 양극 중의 하나를 “모스크바”라는 강력으로 이름으로 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한 극의 이름을 나는 감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Ⅵ. 결론
우리 시대의 병은 다른 어떠한 시대의 병과도 다르면서 또한 다른 모든 시대의 병과 똑같은 병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버는 낯설음(Verfremdung)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나와 세계 사이의 낯설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객관의 세계와 ‘나-그것’의 근원어는 그 자체 결코 악은 아니다. 마치 물질이 악이 아닌 것과 같다. 다만 그것이 악일 경우엔 물질이 교만하게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자인 것처럼 행사할 때이다. 만약 인간이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을 지배(Walten)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인간 넘어서 부단히 점증하는 ’그것‘의 세계가 넘치게 될 것이다.
마르셀(G. Marcel)이 일찍 부버의 입장을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셀은 기술 통치화로 특징 지워지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너’의 의미를 대응적 힘으로 내세우는 것인데 바로 이것을 부버가 자신의 사명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았다.폴 틸리히는 개신교 신학이 부버의 종교적 메시지와 신학적 사고에서 수용했으며 또 수용해야 하는 것을 제시한다. 틸리히는 세 가지 중요한 방향에서 본다. 즉 부버가 예언자적 종교를 실존적으로 해석한 것, 예언자적 종교 내의 한 요소인 신비주의를 재발견한 것, 그가 예언자적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특히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 이해한 것이 그것이다.
틸리히가 볼 때, 첫 번째 요점은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조직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부버의 종교 해석은 “실존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부버는 ‘나-너’관계와 ‘나-그것’관계를 구별한다. 이 구별은 실존주의의 주요 문제를 담고 있는데, 즉 어떻게 ‘그것’이 아닌 ‘나’로 존재하게 되거나 될 것인가, 어떻게 사물이 아닌 인격으로 존재하거나 될 것인가, 어떻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존재하거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부버는 이 질문을 제기했고, 예언자적 종교에 기초해서 그리고 그 힘으로 대답했다. “너”를 만나는 것과 그것을 그 자체로 수용하는 것 외에 “내”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고, 유한한 “너” 속에서 “영원한 너”를 만나고 수용하는 것 외에 “너”를 만나고 수용할 다른 방법이 없다.
틸리히는 말한다. “개신교 신학적은 종교적 실존주의의 이런 생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보다 덜 근원적이며 덜 강력하지만, 또한 덜 역설적이며 덜 강제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신교에 있는 정통주의 전통과 자유주의 전통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부버의 생각들이 끼친 온전한 영향을 그에 합당하게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틸리히에 의하면, “자유주의 개신교는 성경의 하나님을 근대 기술문명의 ‘그것’의 세계 맞추었다. ... 개인은 생산과 소비라는 거대한 기계에 종속되었고 인간 자신은 자극과 반응의 법칙을 따르는 기계가 되었다. ‘나-너’관계는 감정과 주관적 느낌에 넘겨졌다.... 부버의 용어로 말하자면 ‘나-그것’ 관계의 영역 안에 머문다. 그 생각들은 ‘그것’의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작할 때부터 ‘그것’의 세계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자유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나-당신>의 관계를 <나-그것>으로 변형시켰다. 합리적 방법이나 비합리적 방법에 의해서건, 도덕이나, 교리나, 제의에 의해서건, ‘영원자 당신’이 조작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신적인 ‘당신’은 그것이 되고, 그 신성을 상실한다. 폴 틸리히는 부버의 <나-당신>의 철학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모두 도전하면서 그 양자택일 넘어서는 길을 지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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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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