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한 ‘너’안에서 서로 만난다. ‘너’는 ‘나’와 마주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태어난 대로의 ‘너’는 모든 낱낱의 관계에 있어서 실현되지만 어떠한 관계에서도 완성되지 않는다. 태어난 대로의 ‘너’는 오로지 본질적으로 ‘그것’이 될 수 없는 저 ‘너’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서만 완성되는 것이다.
2/ ‘영원자 너’의 이름
맨 처음 신화(神話, Mythe)는 송가(頌歌, Lobgesang)였다. 그러다가 이름들은 그것의 언어(Essprache)속에 깃들게 되었다. 신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속에 참으로 ‘너’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그 어떤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의 참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리고 신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만일 다른 어떤 것으로써도 제약할 수 없는 자기 생명의 참 ‘너’를 향하여 온 존재를 기울려 부른다면 그는 곧 신을 향해 부르는 것이 된다.
3/ 우리의 의지의 중요성
우리의 염려해야 하는 것은 상대편이 아니라 우리 쪽이며, 은총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이다. 은총은 우리가 그것에로 나아가고 그것이 나타남을 고대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에게 관계한다.
포기해야 되는 것은 ‘나’가 아니라 저 그릇된 자기주장의 충동, 즉 의지할 수 없으며, 엉성하고, 지속성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관계의 세계로부터 사물을 소유하는 것에로 인간을 도피하게 하는 자기주장의 충동인 것이다.
이렇듯 관계란 선택받는 것인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며, 수동인 동시에 능동이다. 이 세계에 있어서의 어떤 존재나 어떤 실재와의 진실한 관계는 모두 배타적이다. 그러한 '너’는 온 하늘에 가득 차 있고 다른 모든 것은 ‘너’의 빛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가 그것으로 바뀌자마자 관계의 세계는 이 세계에 대한 부정이 되며, 그 배타성은 만물을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동일한 것이다. 이 절대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낱낱의 것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 절대적인 관계 속에 포괄되어져 있다.
4/ 신의 현존 속에 있다는 것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으로는 신에게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계를 응시하는 것도 신에게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를 신의 안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신의 현전 속에 있다.
‘여기에는 세계, 저기에는 신’ - 이것은 ‘그것의 말(Estrede)이다. ’세계 안에 계시는 신‘ - 이것 또한 하나의 ’그것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너‘안에서 포괄하는 것, 모든 것을 신 안에서 파악하는 것, 이것이 완전한 관계이다.
확실히 신은 완전한 타자(das ganz Andere)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완전한 자기(das ganz Selbe)이다. 즉 완전한 현전자(das ganz Gegenwärtige)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의 ‘나’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비밀이기도 하다.
5/ 마주서 있는 존재로서의 신
모든 낱낱의 ‘너’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너’를 찾는 마음(Du-Sinn)은 그 ‘너’가 ‘그것’으로 바뀌고 마는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모든 낱낱의 ‘너’를 넘어서면서도 그들을 떠나는 일 없이 그의 영원한 ‘너’에게 이르려고 노력한다. 어떤 것이든 그 속에 신이 깃들어 있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찾음이 없는 발견이며, 가장 근원적인 것과 근원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원한 ‘너’를 발견할 때까지는 만족하지 못하는, ‘너’를 찾는 마음(Du-Sinn)은 실은 그 영원한 ‘너’를 처음부터 현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은 어떤 무엇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우리에게 직접 그리고 우선적으로, 지속적으로 마주 서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은 정당하게는 오직 부를 수 있을 뿐, 진술될 수는 없는 것이다.
6/ 신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요소 : 기도와 희생
신과의 관계의 본질 요소를 감정으로 보는데, 그것은 의존감정(Abhänggigkeitsgefühl), 요즘은 보다 정확하게 피조물 감정(Kreaturdefühl)이라고 부르고 있다. 옳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완전한 관계의 성격을 크게 오해하게 한다.
심령의 차원에서 볼 때 완전한 관계는 오직 양극적으로만, 오직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즉 서로 반대되는 감정의 일치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즉 피조물다운 그리고 동시에 창조자다운 느낌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미 한쪽에 의하여 제약받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무제한으로 그리고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 위대한 종, 곧 기도와 희생이 시대를 따라간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자기를 기울이며 비록 신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어도 자기가 신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안다. 희생을 드리는 사람은 어떠한가? 나는 그 사람, 곧 신이 번제(燔祭)의 향(香)을 원한다고 생각하였던 옛날의 정직한 종을 멸시할 수 없다. 그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그를 대신하여 계속 말한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이 나를 통해서”라고. 마술은 관계에 들어서지 않고 작용하려고 하며, 허공에서 재주를 부린다. 그러나 희생과 기도는 ‘신 앞에’ 서며 상호 작용을 뜻한 거룩한 근본어의 완성에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