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만큼의 생각, 한 걸음만큼의 성장을 위해

교실과 현실 사이

by 시소

딱 한 뼘만큼이라도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고,

딱 한 걸음만이라도 성장해 준다면 오늘도 기꺼이


1년에 한 두번은 토론 활동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수업을 기획한다. 올해 토론 수업의 논제를 무엇으로 정할까 여름 방학 내내 고민했다. 여러 논제들을 머릿속으로 굴리던 중 방학 막바지에 10대들의 딥페이크 불법합성물 범죄 문제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달구었다. 그러고보니 올해 초에 청소년의 SNS 금지법이 미국을 중심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났다. 올해 3월 플로리다주에서 만 14세 미만 어린이, 청소년의 SNS 사용을 제한하는 금지 법안이 통과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관련 법안이 앞다투어 발의되고 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학생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학생들의 관심도 끌 수 있는 논제로 제격이다.

2학기 첫 수업에 들어가 토론 수업을 안내하고, 논제로 ‘만 16세 미만 어린이, 청소년의 SNS 가입을 금지해야 한다’라고 썼더니 대뜸 교실 여기저기에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진다. 학급 정원 25명 중 찬성은 반마다 1~5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SNS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제약이 가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에 대해 타당성있는 근거가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효과적인 토론을 위해 사전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찬반 입장의 인원차가 너무 압도적으로 벌어지는데다 자신의 입장만 강화하는 토론은 교육적이지 않다는 생각에서 SNS 금지법에 대한 토론 활동을 보다 조심스럽게 설계하고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해야 할 첫번째 단계는 가르치기보다 멈추는 일이다. 가르치는 내용과 방향을 나 혼자 일방적으로 정해서는 안된다. 의욕에 앞서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단기간에 쏟아내서도 안된다. 일방적인 교육은 효과적이지 않을 뿐더러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오히려 반발심만 키울 뿐이다.

이 논제에 대해 반대 입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파악한 뒤,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청소년의 SNS 사용과 관련한 문제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기사화되고 있는 10대들의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을 비롯해, 올해 1학기동안 우리 학교에서 일어난 SNS 사용의 부정적인 사례가 생각났다. 흡연하는 모습을 개인 SNS 라이브방송으로 송출한 학생과 그 모습을 따라하며 방송에 함께 참여한 학생들이 적발된 일이다. 학교에서는 흡연과 관련해 선도위원회를 열었으나 SNS 사용에 대한 제재는 규정이 없어 가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자해 흔적을 사진찍어 SNS에 올리고,그 친구들을 따라하며 경쟁적으로 몸에 자해 흔적을 남기는 학생들의 사례도 있었다. 흔히 패션자해라고 일컫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졌다. 유독 많은 자해자국이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위기관리위원회를 열고, 학생 전체를 상대로 생명존중교육과 자살예방교육을 진행했으나 교사들조차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학교에서 취하는 조치와 별도로, 흡연이나 자해 행위를 자랑스럽게 SNS에 올리는 학생들과 이런 행동을 쉽게 따라하는 여러 학생들의 모습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SNS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과 옳고 그름을 떠나 새롭거나 충격적이거나 재미있어 보이기만 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학생들의 사고방식이 무서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옳고 그름만을 가르쳐서는 이 문제가 해결될리 만무했다. 그들도 그런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더러,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어른들의 대응을 따분하거나 지겨워했고 그런 어른들을 조롱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SNS와 관련해 또래집단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의 유형에서 벗어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그들만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입장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학습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어른들의 역할을 부여해 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토론을 하기 전에 이 논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생각해 보았다. 당사자인 학생들 외에 학생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학부모,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는 교사, 발의된 법안에 찬반 투표를 해야 하는 정책결정자인 국회의원, 총 4가지의 역할을 설정하고 이 역할들이 ‘만 16세 미만 아동 청소년의 SNS 가입 금지법’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임을 설명했다. 학부모는 학생들의 보호자로서 청소년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염려하면서 그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 청소년들과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학생들이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 교사 역할, 여러 국민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세계적인 정세를 파악하여 우리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이 곧 법률로 연결될 수 있는 국회의원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시간을 가진 다음, 제비뽑기를 진행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어른들의 역할과 의무를 고려하여 생각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각각의 역할 속에서 찬성과 반대 주장 역시 제비뽑기로 정했다. 수업 속에서 찬반 토론이 팽팽하고 원활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던 학생들이 억지로라도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면서 다양한 의견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4개의 역할과 함께 찬성과 반대 입장에 따라 총 8개의 모둠이 만들어졌다. 학생 역할의 찬성과 반대, 학부모 역할의 찬성과 반대, 교사 역할의 찬성과 반대, 국회의원 역할의 찬성과 반대 모둠이 무작위로 만들어져 토론 준비를 시작했다. 수업 속에서 학부모들에게는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교사들에게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국회의원들에게는 의원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보다 재미있고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에 임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학생들은 어색해하면서도 다양한 성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근거 자료의 출처를 정확하게 쓰도록 안내하여 주장에 대해 타당성있는 근거들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했다. 논문을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주고, 신문 기사나 도서와 같이 공신력있는 언론사 사이트나 출판물 속에서 청소년의 SNS 사용에 대한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지도했다.

드디어 토론 당일, 토론 진행중에는 더이상 논제에 대한 찬성,반대가 중요하지 않았다. 학생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한 친구들은 ‘청소년들의 SNS 사용률 증가, 10대들의 딥페이크 범죄, SNS를 통한 우울감이나 불안, 자존감 하락, SNS가 청소년의 의사소통과 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 등에 집중해 근거를 제시했고, 학부모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한 친구들은 ‘SNS가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 가정 적응이 스마트폰 사용에 미치는 영향, 청소년의 자기주도성과 창의성 발현의 문제’ 등에 집중해 근거를 제시했다. 교사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한 친구들은 ‘SNS의 교육적 효과, 10대들과 교사간의 상호작용 및 의사소통 문제, 앞으로의 교육적 방향’ 등을 중심으로 근거를 제시했고, 국회의원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한 친구들은 ‘청소년의 SNS 사용 제한에 대한 세계적인 흐름, 범죄와의 연관성, 디지털강국인 우리나라의 특성’ 등을 중심으로 근거를 제시했다. 찬성과 반대의 주장을 제비뽑기함으로써 억지로 숫자를 맞춘 점에 대해 우려했으나 막상 토론을 진행해 보니 학생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학생들만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입장에서 사고하는’ 연습을 충실하게 해낸 것이다. 그 결과, 찬성과 반대 비율 2:20으로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한 학급에서는 토론 진행 후 13:9의 비율로 청소년의 SNS 가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훨씬 더 많아지는 일도 있었다. 다양한 역할에 입각해 토론에 참여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생각보다 깊이있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한 결과일 것이다.

토론을 진행하는 중에, 인스타그램이 만 18세 미만 이용자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을 공포했다. 거의 한달간 진행했던 토론 수업을 마치고 이 기사문을 읽어주면서 실제로 내년부터 여러분의 SNS 사용에 제한이 가해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예전같았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겠지만, 다수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변화가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토론 활동을 통해 학부모나 교사, 국회의원이 되어 본 학생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학생들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생 역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펼쳐본 다수의 학생들이 무조건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해선 안된다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딱 한 뼘, 아니 눈꼽만큼이라도 사고의 확장이 일어났다면 그것으로 이번 토론 활동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내가 의도한 학습 목표가 모든 학생들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했지만, 이제는 그런 비현실적인 기대는 하지 않는다. 동일한 책을 읽고 동일한 수업을 진행해도, 어떤 학생은 꿈쩍도 하지 않고, 어떤 학생은 딱 한 걸음 나아가고, 어떤 학생은 한 나라 혹은 전 세계를 품을만큼 성장한다.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딱 한 걸음만큼의 성장, 아니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의 성장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퇴화 역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성장은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므로.

전반적으로 성공한 토론수업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토론 전의 의견과 토론 후의 의견 변화가 거의 없는 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학급에서조차 변화하지 않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 보다 타당성있는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약간의 변화를 의미있게 생각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학생들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교실에서는 늘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일방적인 설명이나 지시를 최소화하고, 내가 주목받는 일은 없도록 수업을 설계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학생들의 작은 행동이나 변화가 내 수업의 의미가 된다. 그것으로 나를 지우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찾는다. 그러므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성장해준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다. 학생들의 성장을 발판삼아 오늘도 새로운 수업을 준비해 나간다. 이런 날은 교사도 참 할만한 일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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