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고향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이상한 사명감에 휩싸여, 여행이 아니라 '고향'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찾기 시작했다. 바다와 산이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조건이었다. 시골에서 사는 삶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나와 남편은 결혼 전부터 도시남녀를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우리의 주된 데이트코스는 영화관과 서점이었고, 아무리 자연 생활이 좋아도 문화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단독 주택에서 지냈다. 내가 10살 때 부모님께서는 우리 집을 스스로 설계하고 지으셨다. 그 집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마당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고, 큰 바위로 흙을 막아서 만든 화단에는 온갖 꽃과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저런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사실 그 집에 살 때 집에 대한 가장 큰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주택은 살면 살수록 불편해졌다. 집안은 삐걱대고 고장나기 일쑤고, 마당은 철마다 할 일들을 가득 안겨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쉬는 날마다 공구함을 들고 어머니가 손봐달라는 집안 곳곳에 매달려 계셨다. 때로는 하루종일 제대로 잠기지 않는 대문 앞에서 낑낑대거나, 썩어가는 화장실 나무 문을 떼어 페이트칠과 방수코팅을 해서 다시 달거나, 곰팡이가 난 발코니 벽을 닦아내고 보수하거나, 소리가 심하게 나는 방문에 기름칠을 하고 조이는 등의 일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주로 마당의 꽃나무들과 옥상의 텃밭을 가꾸었다.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시들시들하던 식물들이 새로운 생명력으로 빛났다. 나는 지금도 그 비법을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요즘도 우리 집에서 이유도 모른 채 시들어가는 화분을 어머니에게 들고가면 신기하게 몇일만에 생명력을 회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그저 경외감을 가지고 내가 키우던 시들시들한 식물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아마도 어머니의 부지런함이 그런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머니는 날이 따뜻해지면 호미를 들고 나가 땅을 갈고, 채소나 꽃씨를 사다 심고, 거름을 주고, 음식물쓰레기를 잘 선별해 우리를 먹이듯이 땅에 먹이고, 물을 많이 줘야하는 시기에는 마당이나 텃밭 물 주는 주기에 맞춰 여행 날짜를 변경하는 등 식물을 키우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때로는 썩어서 버리는 고구마나 감자 등을 옥상 텃밭에 뿌려놓고 뭐라도 하나 싹이 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수고에 비해 알이 얼마 들지도 않는다는 나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고구마순이라도 잘라 먹으면 이득이라는 태평한 소리를 하곤 했다. 내 동생은 엄마가 자신보다 식물을 바라볼 때 더 사랑스러운 눈이 된다는 질투어린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하던 부모님은 집 안팎을 관리하는 일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런 부모님을 바라보는 나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집이란 끊임없이 살피고 고치면서 나의 수고를 먹고 몸집을 불려가는 괴물같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단독 주택에 살던 나는 결혼 후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서 신세계를 경험했다. 무엇보다 집에 들어오면 온전히 쉴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집이란 끊임없이 돌보고 고치고 살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책 한 권을 들고 소파에 누워 마냥 뒹굴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너무나 좋았다. 결혼을 하고 나면 나 역시 부모님처럼 집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고를 당연히 감당해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파트는 '관리사무소'라는 멋진 곳이 존재했다. 우리는 물이 잘 안 나오거나 보일러가 이상하면 당연하게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아버지'를 찾았다. 그리고 뒤이어 이런저런 공구를 가지고 오라는 심부름을 해야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한숨을 쉬거나 짜증을 내는 아버지의 한탄을 들어야 했고, 일이 언제쯤 끝날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언제까지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집안 보수에 나름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계시던 나의 아버지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서는 업체를 따로 부르지 않고 스스로 그 많은 일을 해결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아버지는 어떻게 수도, 전기, 가스 등의 전방위적 분야에 대한 지식을 모두 섭렵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그 어떤 공대생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최고의 기술자이자 학자라는 생각을 한다. 공대 출신인 내 남편은 주방 전등 하나 가는 것도 전기 기술자를 불러서 하자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장난감이나 전동칫솔의 건전지를 가는 것 이상의 일을 남편에게 부탁하지 않는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메뉴얼을 보거나 '관리사무소'에 전화한다. 그렇게 살아도 아파트 생활의 문제는 잘 해결됐다. 정말 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좋아하던 아파트 생활을 정말 접어야만 하는 걸까. 바다와 산이 있는 어딘가를 찾아야겠다고 고민하던 와중에도 이 아파트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어디로 갈까보다 과연 내가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가 더 큰 걱정이었다. 자연 속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파트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 곁에 있어 주어야 했지만, 하루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삶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연륙교가 있는 섬으로 자원해서 근무처를 변경하고, 바다가 보이는 신식 빌라를 계약했다. 육아시간을 활용해 최대한 일찍 퇴근하고, '퇴근 후 여행'을 나와 아이들의 일상 모토로 삼았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이 바로 '영흥도'이다. 연륙교가 있어 1시간 내외면 서울, 경기, 인천 등지로 나갈 수 있고, 대부도와 선재도 등의 여러 섬과 연결되어 있어 다양한 여행지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바다와 산이 있으면서,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쉽게 갈 수 있는 근무처라면 좋겠다 싶어 선택한 곳인데 참으로 보물같은 곳을 발견했다. 우리가 살게 된 빌라는 따뜻하고 쾌적했으며, 도보로 5분 거리에 하나로 마트, 24시간 편의점, 영흥버스터미널이 붙어 있었고, 무엇보다 바다와 갯벌이 있었다.
서해 바다를 눈 앞에 끼고 살면서 느낀 점은 서해는 그냥 '바다'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날 창밖에 걸린 풍경이 '바다'였다면, 또 어떤 날은 창밖에 '갯벌'이 펼쳐졌다. 수평선이 아니라 지평선을 따라 펼쳐진 갯벌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과연 바다일까 싶은 의문이 든다. 갯벌은 '바다'라는 이름에 가려진 '바다'의 진짜 모습이다. 그러므로 바닷물이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바다'라는 말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늘 '우리집에서는 바다와 갯벌이 보인다'라고 말한다.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이 그 다채로운 풍경을 상상해주기를 기대하며.
갯벌로 인해 바다는 고요해 진다. 영흥도에 살기 전까지 내게 바다는 전혀 고요한 곳이 아니었다. 절벽을 때리는 높은 파도가 역동적인 제주도 바다, 끊임없이 철썩이는 동해 바다, 부산 태종대의 자갈밭을 촤르르 훑고가던 요란한 바다의 이미지를 품고 있던 나는 고요한 서해 바다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조용히 비워졌다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서해 바다의 모습은 '바다'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상당히 많이 바꾸어 놓았다. 어느날은 수조에 물 담기듯 서서히 다가오는 바닷물이 보이고, 어느날은 창밖에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바닷물이 걷히고 탐스러운 진흙과 수많은 숨구멍으로 가득찬 갯벌은 고요한 쉼, 그 자체였다.
철썩이는 바닷물이 여행지의 바다라고 한다면, 그 아래에 깔린 잠잠한 갯벌은 생활 터전으로서의 바다이다. 갯벌이 열리면 영흥도에는 종종 방송이 흘러나온다. 마을 사람들에게 갯벌이 열렸음을 알리고, 갯벌에서의 공동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과거에는 갯벌에서 조개나 굴을 캐면서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열혈 부모들이 많았다고 한다. 갯벌은 고요한 모습과는 달리 그 안에 풍요로운 것들을 잔뜩 품고 있다. 진흙 위로 퐁퐁 터지는 숨구멍들은 갯벌의 존재 이유를 말해 준다. 갯벌이 열리면 비로소 바다 속에서 숨을 터트리며 사는 것들이 보인다. 이 바다가 온전히 품고 살아가는 생명들이 보인다.
철썩이는 파도처럼 화려하게 살고 싶었으나, 내 숨구멍 하나 틔우기 급급해 쫓기듯이 살았다. 나 역시 남들처럼 더 넓은 집으로, 더 학군이 좋은 곳으로, 더 편리하고 깨끗한 곳으로 이사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학업을 시작하는 시기에 더 좁은 집으로, 인구가 더 줄어드는 곳으로, 여러가지로 더 불편한 곳으로 이사를 와 버렸다. 내 선택이었으나 불안했다. 잘하는 일인지 수시로 의심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게를 쫓아다니며 나는 이곳에 나만의 숨구멍이 하나 열렸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들을 쫓아가는 데 급급할 때는 숨이 조여오는 것 같았으나, 이 곳에서는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이 곳에서 마음껏 퐁퐁 숨구멍을 열고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은 어린시절 살았던 전라도 신안군의 작은 섬에 대해 '내 삶의 모든 표준이 여전히 그 섬에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섬으로 세상을 잰다'라고 말했다. 어린시절을 보낸 시골의 정경은 누군가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는 법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영흥이 그런 고향의 역할을 해주길 소망한다.
영흥에 살면서 우리 가족은 계절을 새롭게 배워가고 있다. 둑방길에 쑥이 올라오고, 국사봉 오르는 길에 진달래가 피고, 비치카페에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은 봄이다. 바닷가를 따라 카페와 음식점들이 노천 테이블을 늘리고, 해수욕장에 새로운 모래가 깔리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한편으로는 오디가 익는 계절은 여름이다. 찬바람이 불고 단풍이 들고, 갯벌에 굴이 보이기 시작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눈에 띄게 오가는 사람들이 적고 길가 곳곳이 얼기 시작해 온 섬에 꼼짝마라 정적이 흐르고, 사위가 급격하게 조용해지는 계절은 겨울이다.
봄에 쑥을 캐서 쑥버무리떡을 해 먹거나 진달래를 따다 화전을 해 먹는 일, 여름에 양손 가득 오디를 따서 양껏 먹는 일, 가을에 갯벌에 가서 조개나 굴을 캐는 일, 겨울에 공터에 나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눈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일,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을 오롯이 맞는 일. 우리 가족이 영흥에 와서 처음 해 본 일들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향을 느끼고, 입으로 맛보는 이 모든 계절의 감각은 나를, 우리 가족을 살아있게 한다. 삶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다. 어린시절에 살았던 섬으로 세상을 잰다는 황현산 선생님처럼 우리 가족들도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영흥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계절을 가늠해 보지 않을까 싶다. 쑥 캐기 딱 좋은 철이네, 오디가 한창인 계절이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럴 때면, 마음 속에 진달래 가득 핀 산길이 보이고, 화전 구워지는 냄새가 풍겨오고,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오디즙이 입 안에 흐르고, 돌의 표면처럼 거칠지만 반갑게 뾰족한 굴껍질의 촉감이 만져질 것이다.
도시에 살 때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던 계절의 변화가 영흥에서는 매우 선명하게 느껴진다. 지금 내가 자연과 매우 가까이 머물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결국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깨달음은 계절에 대한 이 예민한 감각으로부터 온다. 꽃놀이, 물놀이, 갯벌놀이, 눈놀이를 하면서 계절을 지내다보면 어느 계절에는 내 아이들이 훌쩍 컸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한 계절 한 계절을 투명하고 성실하게 감각하며 쌓아가다보면 나도 아이들도 삶 속에서 투명하고 성실하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 잣대를 가족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세상을 조금 더 편안하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어떤 힘겨운 일이 있어도 서로가 '괜찮아. 오디 한 입 가득 넣으면 기분 좋아질걸.', '괜찮아. 이 정도는 조개캐던 그 뚝심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괜찮아. 한 겨울 영흥 바다의 칼바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하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찾았다! 우리 가족의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