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믿음 사이
거짓의 반대말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또 다시 신고가 들어왔다.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찍은 영상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고 한다. 그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 내 SNS 대화창으로 전송됐다. 어떤 학생들은 끊임없이 교칙을 어기고, 교사의 눈을 속인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열심히 신고한다. 그 안에서 나는 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위반사항을 찾아내고 감시하고 조사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사람이 된다.
해당 학생을 불러 이 문제에 대해 물었더니 역시나 발뺌을 한다. 신고된 사진을 보고는 수업을 모두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받은 뒤에 찍은 영상이라고 한다. 신고한 학생이 수업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들었다 한다고 말했으나 끝까지 아니라고 한다.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학생들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당연한 듯 학생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과 대화를 하면서도 학생의 말을 믿지 못한다. 교사가 학생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 교사가 학생과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씁쓸하게 곱씹는다.
그 학생의 휴대폰을 휴대폰함에서 빼내 하루종일 가지고 다녔다. 방과후에 다시 불러 휴대폰을 켜서 특정 날짜의 갤러리를 열어보라고 했다. 학생의 눈동자에 흥분이 장착되기 시작한다. 자신이 왜 갤러리를 보여줘야 하냐고 열을 내기 시작한다.
“신고한 학생의 말만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고, 네 말만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으니 너 스스로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라는 거야. 그 날 찍은 영상이 수업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나도 널 믿을게.”
나는 이미 그 학생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이제라도 진실을 말하든지, 만에 하나라도 네 말이 진실이라면 떳떳하게 증명을 해 보이라고 몰아붙였다. 거짓의 반대말은 진실이 아니다. 거짓의 반대말은 믿음이다. 이미 학생을 믿을 수 없는 나는 학생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갤러리를 열어 봐라, 열기 싫다 한참을 실랑이했다. 도대체 갤러리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보여줄 수 없는걸까 의아했다. 결국 학생은 휴대폰 갤러리를 보여줄 수 없다며, 신고 내용을 모두 인정했다. 그 학생은 수업 중 몰래 휴대폰을 사용하고, 딴짓을 하고 있는 친구의 행동을 영상으로 찍었으며, 그 영상을 게시하면서 욕설까지 한 것을 인정했다. 반성보다는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내 행동에 지고 만 것이다. 온갖 짜증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로 마구잡이로 갈겨쓴 진술서를 담임선생님께 보여드리고 학생부의 징계 절차대로 처리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이미 여러가지 일로 학교 봉사활동 처분을 받은 그 학생은 이번 일로 교내 봉사활동을 2시간쯤 더 추가할 것이다. 그 시간이 이 학생에게 얼마나 큰 반성의 계기가 될지 의문이다. 나는 성실하지 않은 학생을 붙들고 봉사활동을 진행해야 할 봉사활동 담당 선생님께 미안한 일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를 해결한 것인지, 아니면 문제를 키운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한 일이 과연 교육적인 일이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학생이 아침에 휴대폰을 제출하지 않고 숨긴 점, 수업 중에 몰래 휴대폰을 사용한 점에 대해 처음부터 솔직하게 인정했으면 어땠을까. 수업 중 친구의 행동을 영상으로 찍고 공유하고 욕설까지 한 행동에 대해 친구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으면 어땠을까. 이상적이고 교육적인 대화로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을까. 그 이후에 학생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개선된 태도를 보였을까. 그렇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까.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경찰과 용의자의 관계가 된 듯한 이번 일을 다른 모습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안을 조사하고 학생의 거짓말을 캐내는 일 외에 내가 무엇을 더 해야했던 걸까. 학생을 믿을 수 없는 교사는 슬프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학생을 믿지 못하는 교사는 슬픔을 넘어 좌절감을 느낀다. 거짓과 믿음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하고,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하고 반성할 줄 아는 성인으로 크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장 과정 속에서 누적된 배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짓말은 할 수 있다. 세상에 거짓말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거짓말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실수를 하고, 미숙한 감정을 분출하는 일 등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미숙한 학생들이라면 더욱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성장의 과정으로 작용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지 모른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끝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 학생도 이 일을 통해 성장하길 소망한다. 자신이 한 일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뒤척이고, 자신의 실수를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생각해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기기를 바란다. 그저 그런 바람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했다.
다음 날은 정말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학교 옆 아파트의 주차장 차단기가 고장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범인이 우리 학교 학생인 것 같다고 한다. 담임선생님들께서 차례로 CCTV를 본 뒤, 특정 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께서 학생을 불러 ‘네가 학교 옆 아파트 앞을 지나다가 가방에 걸린 차단기 끝부분을 확 잡아당겨 차단기가 고장이 났다’고 이야기했더니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담임선생님께서 네 얼굴을 확인했다고 하자 그 앞을 지나간 적도 없다고 한다. CCTV에서 정확히 네 얼굴을 확인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까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끝까지 거짓말이다. 더이상의 대화가 의미없다고 생각한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하고 경찰에 신고된 내용을 알려드렸다. 학생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이제 부모님의 몫이다. 경찰에서 확보한 CCTV를 학생과 함께 확인하고, 차단기 수리비에 대해 아파트쪽과 합의해야 할 것이다.
학생이 거짓말을 하든 하지 않든, 학생이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교사의 손을 떠난 이번 일에서 이제 그 누구도 학생이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모른척하고 발뺌한 일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교사들 역시 이 학생이 끝까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이상 교육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행동에 대해 문제삼을수록 교사들만 피곤해질 뿐이니까. 학생은 부모님이 상대방과 합의하고 해결할 문제에 대해 교사가 나서는 것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할테고, 학부모 역시 이제 이 일은 교사의 손을 떠난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교사의 존재 이유에 대해 자문했다.
교사는 때때로 감시자이고, 때때로 전달자일 뿐 진정한 교육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지경이라면 학습 내용은 AI가 전달하고, 문제가 생기면 경찰이나 변호사가 등장해 증거에 따라 잘잘못을 따지면 될 일이다.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교사들은 그 어떤 교육적인 대처도 하지 못한 채 학생들을 향한 믿음만 잃어가고 있다.
믿을 수 없는 학생과 믿지 못하는 교사가 함께하는 학교는 지옥같다. 니체는 ‘천국은 신앙이 아니라 생활방식’ 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소망하는 천국은 저 먼 하늘 나라의 어딘가, 먼 미래의 사후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학생과 교사의 어떤 생활 방식의 변화가 학교를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