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자대배치를 받고 처음으로 부대에 갔을 때는 11월이었다. 가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전방의 날씨는 이미 한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수시로 내리는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고 금방 치운 눈은 돌아서면 언제 치웠냐는 듯이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다.
영하의 날씨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눈은 막사 지붕에 쌓였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과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 눈은 얼었다 녹았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처마 끄트머리에 여러 개의 고드름을 열었다.
"담당관님 이거 보십시오. 담당관님 보여 드리려고 제가 가져왔습니다."
두 손으로 큰 고드름을 받쳐 들고는 멋쩍은 얼굴을 한 병사가 행정반으로 들어왔다. 막사 뒤편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온 것이다. 이제 군 생활을 시작하는 초임하사에게 그곳을 매서운 겨울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큰 고드름을 들고 밝은 얼굴로 들어오던 병사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여군의 수가 많지 않았다. 화장실, 샤워실, 숙소, 휴게실 등등 모든 것이 남군들 기준이었다. 지금이야 여군. 여군무원의 수도 많아지고 여성인력을 위한 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사단에서 근무할 때였다. 근무하는 건물에 여자화장실이 없었다. 건물 뒤로 나가 못생긴 계단을 서너 개 오르고 몇 미터를 걸어야만 나타나는 야외 화장실을 사용했다.
겨울에 야외 화장실을 이용하는 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나보다 더 열악한 곳에서 근무하는 동기들도 분명 있었으니까 말이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화장실 가는 길은 내린 눈으로 사라져 버렸고, 바로 치우지 않으면 꽁꽁 얼어붙어 빙판이 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누가 치웠는지 화장실 가는 길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담당관님, 보셨습니까? 뒤에 눈 제가 치웠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병사가 눈을 치웠다고 한다. 추운 날씨에 야외 화장실을 사용하는 내가 안타까웠나 보다. 눈을 치워준 병사 덕분에 화장실 가는 길이 편했던 기억이 있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이야기들이니 잊혀도 아무렇지 않은 기억들이다. 사소하고 별것 아닌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이 종종 소환될 때가 있다. 그렇게 소환된 기억들은 옛 전우들 생각으로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지금은 병사들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소중한 감정들은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
20여 년 전 병사들은 순수함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기억된다.
비록 계급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청춘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까 생각해 본다.
내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있듯이 그들도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가 되어 있겠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치열한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들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나와 함께 군생활 했던 많은 20대 청춘들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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