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램

지향

by 밝둡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저마다 말한다. 각자의 소주잔을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울컥한 마음으로 닿았다. 옛날이야기를 오래 듣고 있자면, 지겨웠다. 그때 성공담보다 실패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고, 왜 아직 실패의 길에서 허우적대는지 술잔에게 물어본다. 술이 대답을 해주지 않듯, 우린 답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척 정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술잔을 든 손을 본다. 테이블을 찍듯 날카로운 모양을 한 팔꿈치와, 건들거리는 손목, 그것의 각도, 두꺼운 손가락 두 개에 떠 있듯이 껴있는 술잔에서 소주가 춤을 춘다. 마주치는 잔에 또아리쳐진 다른 이의 소주가 굳어간다. 두 손 곱게 모은 그의 손에 또 다른 손이 받치고 있는 듯한 팔이다. 산 위의 소주가 이사를 떠나는 작은 호수처럼 조심스레 이동한다. 떨리는 입술 끝에서 흘려지는 하나의 술덩어리가 찐득이며 들어간다. 지겹다. 그냥 먹지. 불필요한 움직임을 본 내 머릿속에 취기가 삐죽거렸다. 술이 몸으로 흘러 들어와, 온몸을 흔들고 질퍽거리는 모래를 쏟는다. 무거워진 몸으로 조종이 엉킨 재밌는 방향감각으로 하늘처럼 높은 골목길을 걷는다. 오늘도 하나의 단어가 내게서 지워진다. 술자리에서 쓸데없이, 지나치게, 앞뒤 없이, 오묘하게 끌렸던 벽에서 흘러나왔던 노래 하나가 지워진다. 잊기 싫은 그 노래를 메모장에 적지 않고 지운다. 노래의 어느 부분이 습관처럼 내 입에서 나올 날을 기다려보며, 난 노래를 지운다. 어느 해에 지웠던 그림 속의 할머니 한분이 불러주길 기다려보며, 난 지운다.


기억하려 애쓸 때, 그 무엇은 밀려난다. 하지만, 이렇게 지우는 식의 기억은 어쩌다 마주치는 조합처럼 재미있게 떠오른다. 그것은, 슬픔 그대로의 것일 수 없고, 기쁨 그대로의 것일 수 없으며, 감정의 연장선 대신 지금 가는 길의 울타리를 확인시켜 준다. 길가에 서서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다가 쫓아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글에 분해되어 흩뿌려진 내가 있다. 거대한 한 글자로 대신하지 못해서, 잘게 썰은 것들을 앞뒤 없이 수놓았다. 지금의 나는 모자이크를 맞추려는 누군가의 가늘게 뜬 눈가의 주름살에 올라탄 그림자다. 난 그런 식으로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게 된다. 누군가 나의 말을 지겹게 생각했다고 믿는다. 내가 쓴 글자들 사이에 호수가 생겼다면, 호수 뒤 보이는 탁 트인 곳을 가리는 안절부절못하는 글자를 치우고 싶어졌다. 지운 것들을 고요히 불러내어, 호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말을 하며 깨닫는 순간들이 있고, 글을 쓰며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며, 더 배우는 것들이 있다. 살게 되며 알게 되고, 알게 되며 살게 되는 것들이 있다. 모르고자 외면했던 곳에서, 알고자 허덕이던 시간의 외벽을 마주하고, 알고자 쫒았던 곳에서, 모르고자 외면했던 지혜를 얻는다.


지금은 그저 바라 보고 싶은 마음이다. 쓰여진 글을 호기심으로 쳐다보며, 글자 사이에 생긴 호수를 바라보며, 즐겁게 지겨운 마음으로 내 맘의 호수 근처에 항상 있을 그것의 존재에 감사하며, 내일도, 내년도, 그 뒷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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