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뛸 것,날 것
어제 하루 막막했다. 어제 전날까지의 난 심심하지 않았고, 할 얘기도 많았고, 입안의 침이 줄줄 흘러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는데.
체했다.
글 쓰고, 담배 피우고, 책 읽고, 사색하고, 뛰다가도 멈춰서 메모하고, 그렇게 머리가 되건 심장이
되건, 막혔다.
시험을 반 하루 앞둔 새벽부터 아침이 오기까지 시계를 보며, 초시계를 켜두고 맥주를 한잔이라도 더 마셔야 승리하는 경기를 치르는 사람마냥, 하나라도 더 구겨 넣어야 하는 외워야 할
교과서의 글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 내가 그랬다.
어제 내가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했다.
그리고 밤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배 위에 올려둔 채로 잠이 든 것 같다. 책은 내가 낡아
있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는지 난 그렇게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눈곱도 그대로 둔 채, 뛰기 위한 옷을 입고 뱅글뱅글 돌 수 있는 트랙이 있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트랙은 아직 눈을 덮고 있었고, 그 눈들은 새벽부터 달렸던 사람에게 짓밟혀있었다. 자잘한 무늬를 새긴듯한 눈은 둥글고 긴 운동장이 만드는 그림자의 끝을 따라서 손을 잡고 흩어지고 있었고, 해가 고개를 들기를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기다리는 눈들은 성질 나빠 보이는 그림자와 함께 트랙을 돌며 만날 때마다 추운 입김을 불어댔다.
체하고 낡은 걸 알아차린 몸은 준비 운동을 하지 않고 뛴다. 한 바퀴가 되감을 알려주는 녹지 않고 옆으로 누워있는 여인 같은 눈들은 날 한 번씩 짧게 뛰게 만들었다. 낡은 체한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심장은 낡은 몸이 맞는 것 같다고 내게 한번 더 알려줬다. 발목이 너덜거리며
털럭거리며 제멋대로 나아가진다. 안 죽으려고 더 입은 옷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바퀴의 싸이클이 끝나기 전에 너무 자주 마주치는 듯한 젊은 두 남자의 건강한 등이 보인다. 야광색 옷이 더 반짝이고, 긴 다리는 쭉쭉 뻗어 나가고 거침없다. 발 끝은 땅에 닿는지도 모르게 다시 공중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두 젊은이 모두 하나같이 움직인다. 내 눈에 빨리 감기 기능을 켠 듯, 그들은 내 앞에서 점점 빨라지기만 했고, 슬로비디오 기능을 켠 듯, 한순간 한순간의
몸짓은 참으로 아름답고 강하게 보인다.
뛰던 중, 누군가 왼쪽 뒤에서부터 손 하나가 내 귓가를 흔든다. 에어팟을 빼며 고개를 돌아보니, 같은 러닝클럽의 한 여자가 손으로 인사를 했다. 사십 분 가까이 낡은 몸을 쓰고 있는 나는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인사로 반긴다, '에넨헤센에에에에에' 아 부끄럽다.
그 여자가 말한다. 미소도 참 가볍고 자연스럽다. '너무 빨리 뛰시는 것 같아요 숨이 헉헉대잖아요 그러면 유산소 운동이 안돼요'
어제 내가 배 위에 덮고 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애쓰지 말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곧바로 보이는 그녀는 엑셀 밟듯이 그 운동장 안의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몸을 푼다.
저렇게 잘 달리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도를 줄였다. 말 잘 듣는 사람처럼.
그리고 약속했던 친구와의 사우나로 향했다. 평일이고 낮이지만, 제법 몇 명이 보인다. 평일의 낮에는 보통 내 또래이거나 그 이상이 많다. 낡은 기계에 기름칠해지는 것 같은.
건강하고 큼직한 친구의 꽤 듬직해 보이는 어깨선을 쳐다보고 있다가. 난 열탕과 냉탕과 습식사우나등을 오가며, 최선을 다해서 기름칠을 한다.
행복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무리는 손으로 직접 만든 순두부찌개로 했다. 반찬 하나부터 다섯 가지 내 눈앞에 있는 것들 모두 싹싹 먹어 치운다. 나는 하얀 순두부를 선택했다.
배 위에 있던 마지막장의 입을 벌리고 있던 책과, 어제 하루 채 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슬픈 마음이 혀끝에 닿았지만, 아무 이유 없는 사람처럼 친구를 보고 한번 웃고 나서, 나는 끝까지 다 먹어 치운다.
아까 보았던 그 젊은 두 남자는 지금
무얼 먹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