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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Oct 21. 2021

밥값 굳은 날

윗사람은 어려워

팀원 생일을 빌미삼아 회사 카드로 거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제일 비싼 한우로 주문해서 막 먹기 시작했는데, 옆 테이블에 갑자기 다른 부서 임원분이 직원들 몇 명과 앉는 것이 아닌가! 공손히 인사드리고 맛있게 먹은 다음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임원님께서 부르신다. 그리고 기다렸던 멘트, 본인이 계산할테니 그냥 가라고 하신다. 나이스!

어차피 팀 예산으로 먹으려고 했었지만, 어쨌거나 돈이 굳었다. 한우값이면 직원들이랑 커피 10잔은 더 먹을 수 있다. 임원분께 예의바르게 문자를 하나 드렸다. 정말 감사하다고, 다음에는 제가 그 부서 직원들에게 밥을 사겠노라고. 별 거 아닌 일이지만 기분이 좋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으로 직장생활 하는거지. 


밥값 굳은 얘기 따위를 글로 적고 있는 이유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몇주 전 바로 옆에서 밥을 먹었고 심지어 다 먹고 계산대 앞에서 인사를 드렸는데도, 신기하게 자기들 것만 계산한 또 다른 임원이다(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아, '이건 너무 싸니까 다음에 비싼 거 사줄게.'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후로는 깜깜 무소식이다. 맨날 말로는 '밥 한번 사줄게' 해놓고 정작 마주쳤을 때는 모른 척 넘어가는 분. 자기가 생색낼 수 있는 자리인지 아닌지 칼같이 계산하는 분. 어쩌다 밥 한번 사주는 날에는 젓가락질을 왜 그렇게 못하냐는 둥 한 시간 내내 피곤하게 떠드는 그 분이 이 시점에 굳이 떠오르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 또 있다. 자기 딸 결혼한다고 말단 사원까지 결혼식에 초대하는 임원. 도대체 축의금을 얼마를 해야하는지, 그 날 다른 일정이 있는데 가서 얼굴을 비춰야 하는지, 안 가면 앞으로 회사생활이 힘들어지지는 않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직원들을 보며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었다. 뭐가 맞는 걸까. 내가 그 위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작 그 분은 직원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까. 


회사에는 참 여러가지 종류의 '윗사람'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윗사람은 일 시키는 사람 그 이상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평가하며, 연봉을 결정한다. 혼도 내고 달래기도 한다. 때로는 밥도 사주고, 술도 산다. 라떼질도 하고, 가끔 옳은 소리도 한다. 허세도 부리고, 대접받는 걸 좋아한다. 간혹가다 지위를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인간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윗사람은 그런 존재다. 약간은 벼슬같고, 약간은 꼰대같은 느낌. 그리고 회사에서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윗사람이 된다. 후배 하나만 들어와도 선배가 되고, 점점 연차가 쌓이고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새 윗사람 반열에 저절로 들어가 있다. 마치 뭣도 모르고 얼떨결에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으니 각양각색 천차만별이다. 정답이 있을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이면 좀 더 '괜찮은' 윗사람으로 커가고 싶은 마음이다. 존경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마주치기 싫은 존재는 되지 않기를. 밥 사주고도 욕 먹는 사람은 되지 않기를. 내 삶을 나누었을 때 진심으로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너무 큰 욕심이려나. 


옆 테이블에 우연히 앉은 후배들의 밥값을 내는 일은, 어쩌면 참 쉬운 일이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회사 경비로 생색내는 건데 뭐 깊이 고민할 일도 아니고, 후배 역시 대단히 고마워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돈도 아까워 좀처럼 베풀 줄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밥값을 내주고도 욕을 먹는다. 경조사도 마찬가지다. 청첩장을 돌린다고 모두 욕을 먹는 건 아니다. 개인사를 알리는 건 개인의 자유며, 거기에 반응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결국 평소에 어떤 윗사람이었느냐의 문제다. 해주는 건 없이 대접만 받으려 하거나 안하무인인 사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이들에게 욕을 먹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윗사람은 되지 말자는 게 내 다짐이다. 


물론 훌륭한 윗사람이 되어야지 마음먹는다고 바로 되는 건 아니다. 나도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에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훌륭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매사에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심으로 후배들을 아끼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일에 먼저 기뻐하고 슬퍼하는 윗사람을 싫어할 리가 없다. 거기에 비싼 밥도 잘 사주고, 겸손하며, 배울 점도 많으면 더더욱 좋겠지만. 


밥값 굳은 김에, 생각도 한 뼘 키워보았다.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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