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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Mar 02. 2022

졸업식

엄마의 마음

2살, 정확히 15개월부터 다녔던 어린이집을 아이가 드디어 졸업했다. 그리고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자그마치 6년이다. 만 7년 인생에 6년이라니. 살아온 날의 대부분을 한 어린이집에서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보낸 아이의 졸업식 날. 펜데믹 시대에 맞게 ZOOM으로 진행된 졸업식에서, 엄마 아빠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다. 졸업 축하해, 그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줘서 고마워,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실 해야할 말은 정해져있었고 여기에 더 얹거나 뺄 것도 딱히 없었건만 나는 왜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거나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누르고 해야 할 말을 하느라 횡설수설했다. 생애 첫 졸업식이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느낀걸까. 왜 쉽게 말을 잇지 못했던 걸까. 

직장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좋겠다' 그리고 '힘들겠다'. 정말 그랬다. 직장 어린이집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쾌적하고 넓은 공간, 믿을 수 있는 교사와 질 좋은 식사, 무엇보다 가까이에 아이가 있는 게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아이의 등하원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홀연히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고, 그때부터 부산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 옷을 입혀 끙끙 안아 차에 태웠다. 30분, 길게는 1시간 가까이 출근 길을 뚫고 달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던져놓고 사무실로 뛰어가면 이미 녹초였다. 퇴근길도 마찬가지. 큰 아이가 조금 자라 할 만 하니 둘째가 생겼고, 애 둘 딸린 출퇴근길은 그야말로 매일 전쟁이었다. 그렇게 1년에 여름, 겨울방학 3일씩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집에 갔다. 내가 출근하는 날은 물론이고, 가끔 볼 일이 있어 연차를 쓰는 날도 아이는 어린이집에 출근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11시간, 길게는 12시간씩 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어린이집에 항상 1등으로 가서 꼴찌로 나왔던 아이. 그렇게 6년동안 가기 싫다는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따라다녀준 아이, 가끔 '엄마 오늘 일찍 데리러 오면 안 되요?'라고 그 조차도 조심스럽게 묻던 착한 아이다. 그렇다. 미안함이었다. 졸업식 때 나를 괴롭힌 바로 그 감정의 정체는 참으로 오랜만에 온 몸에 사무치는 미안한 감정이었다. 

엄마는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모성을 장착한다. 그리고 모성은 아기를 품에서 떼어놓는 매 순간마다 죄책감을 소환한다. 아이가 우는데 빨리 달려가지 못했을 때,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잠깐 볼 일을 보러 나갈 때, 초보 엄마들은 그 잠깐 동안에도 안절부절 못한다. 마치 내 분신을 떼어놓은 것 같은 불안함,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죄책감은 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맡길 때 극에 달한다. 전업주부든 직장맘이든, 떨어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낼 때 밀려드는 생각은 하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물론 그 생각은 아이를 보내고 혼자서 잠깐 커피 한 모금을 삼키는 순간 싹 사라지긴 한다만. 그 후로도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많이 울었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녁에 잠든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죄책감은 호시탐탐 엄마를 괴롭힌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 어린이집 생활은 일상이 되고, 아이는 자라며, 엄마의 죄책감도 조금씩 무뎌진다. 아침 일찍 눈도 채 못 뜬 아이를 차에 태우며 마음 아파하는 대신 빨리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저녁에는 아이와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할 일을 하느라 미적거리며, 1년에 한 번 뿐인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까먹기도 한다. 평일에 함께하지 못한 만큼 최선을 다해 놀아줘야하는 주말에는 하루종일 TV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거나 누워있기 일쑤다. 그렇게 당연해진 일상 속에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죄책감이 갑자기 뿌연 먼지처럼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건 졸업식 바로 전날이었다. 

아이가 1년 간 어린이집에서 만들고 그린 온갖 작품들을 한가득 집에 가져와 보여주었다. 7살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다채로웠다. 역사, 계절, 음식, 친구, 가족, 학교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수십권의 책을 만들었다. 시계 보는 법, 덧셈 뺄셈도 했고, 글씨 연습장도 있었다. 택배 아저씨에게 편지쓰기, 그림 일기 쓰기는 물론, 직접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도 열고, 요리 유튜버가 되어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7살인데 어린이집에 다녀도 되냐는 걱정, 코로나 때문에 다양한 바깥 활동을 못해서 큰일이라는 걱정은 전부 기우였다. 아이는 1년을 정말 알차게 보냈다. 나는 아침마다 숨가쁘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던져둔 것 밖에 한 게 없는데. 어쨌든 직장 어린이집은 내게 최선의 선택이었고, 아이가 워낙 어린이집을 좋아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꼬박꼬박 보낸 6년이었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졸업을 앞두고, 엄마도 모르는 새 아이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하며 하루의 시간을 채웠다는 사실에 감동이 밀려왔다. 

아이의 작품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중 '엄마'가 있었다. 기억에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을 그리는 시간이었나보다. 잡지에서 오려낸 각종 화장품들, 그 앞에 앉아 표정조차 분주한 아침의 엄마였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를 보는데 마음 한 구석이 시렸다. 아이의 기억 속에 나는 늘 바쁘고, 할 일이 많고, 피곤에 지친 엄마는 아니었을까.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보는 엄마 얼굴, 그 조차도 늘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그래서 자기를 한없이 돌아봐줄 여유도, 사랑을 속삭일 시간도 없는 엄마. 늘 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빨리 안 한다고 화내는 엄마. 그런 엄마인데도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나는 엄마가 좋다고 살을 부비는 아이에게 나는 얼마나 많이 사랑을 표현했을까. 예쁘다는 말, 잘했다는 말 말고 진짜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오래도록 꼭 안아주었던 날이 있었었나. 까마득하다. 그저 그 날 아침의 엄마 모습을 생각나는 대로 그렸을 아이의 그림을 보며 마음 속에 묵혀두었던 6년치의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루 10시간 넘게 어린이집에 넣어둔 게 미안한 게 아니었다. 그 나머지 시간, 아이와 함께 있던 시간이다. 어린이집을 가기 전 짧은 아침 시간, 집에 와서 잠들기 전까지 겨우 두 세 시간, TV와 함께 흘려보낸 숱한 주말,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조차 피곤과 짜증으로 낭비했던 지난 날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다시 6년 전으로 돌아간대도 크게 달라질 자신은 없다. 나도 남편도 해야할 일이 있고, 부모님은 당신들의 삶이 있으며, 그 가운데 아이들을 직장 어린이집에 맡긴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또한 우리 가족의 삶이다. 그 안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시간이기에 후회는 없다. 다만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의 밀도가 좀 더 높았다면,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즉각 반응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내게 있었다면, 졸업식 때 갑자기 밀려드는 미안함의 감정 때문에 버벅대는 일 따위는 없었을텐데.

어쨌거나 아이도 나도 수고했다. 애썼다. 열심히 키웠고, 열심히 자라주었다. 이제 아이는 학교에 간다. 또 다른 6년의 시작이다. 나는 여전히 일을 하고, 아침 저녁으로 분주할 것이다. 이제는 아이가 더 바빠져 좀처럼 얼굴을 마주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자. 중요한 건 시간의 밀도다. 하루에 심호흡 한 번 할 정도의 시간만 남더라도 그 시간을 오롯이 아이를 사랑하는 데 쓰면 된다. 그리고 6년 후의 졸업식 때는 미안해하지 않으리라. 이제는 내 미안함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아이가 자란 만큼 나도 자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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