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결핍, 다른 세계
[세 줄 요약] 처음으로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 민재와 유나는 어색함 속에서 서로의 세계에 대해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두 사람은 '가난'과 '정해진 운명'이라는 각기 다른 결핍과, '자유'에 대한 공통된 갈망을 발견하며 한층 더 가까워진다. 유나는 민재의 세계를, 민재는 유나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미묘한 감정의 싹이 튼다.
SCENE #1 저녁. 학교 앞 시끌벅적한 치킨집
고소한 기름 냄새와 알싸한 맥주 향, 젊은 학생들의 유쾌한 소음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끈적이는 테이블과 플라스틱 앞접시. 민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맞은편에 최유나가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과 생맥주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유나였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며 눈을 찡긋했다.
“자, 건배! 우리의 첫 번째 가설 증명을 위하여!”
‘짠-’ 차가운 유리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 민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보이는 대로 본 것뿐이야. 다들 공포에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걸.”
“그걸 보는 게 실력이지.”
유나는 닭 다리를 하나 집어 민재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많이 먹어. 머리 많이 썼잖아.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해? 그냥 우리 과 졸업해서 좋은 회사 취직하면 되잖아. 한국대 경영학과인데, 다들 가고 싶어 하는 곳.”
그것은 그녀의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민재에게는, 마치 다른 행성의 언어처럼 들렸다. 그는 잠시 치킨을 내려놓고 유나를 바라봤다.
“월급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 있어.”
민재는 뼈를 발라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정해진 판 위에서 남들이 정해준 말 몇 개 옮기는 걸로는, 절대로 내 세상을 가질 수 없어.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려면, 월급 한 푼도 안 쓰고 100년을 모아야 한다는데. 그게 정상적인 게임이라고 생각해?”
“…….”
“나는 그 판 자체를 뒤집고 싶은 거야. 룰을 바꾸거나, 아예 다른 판에서 싸워야지.”
그의 말은 유나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나도 비슷해.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는 거. 숨 막힐 때가 있어.”
“네가? 넌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민재의 말에 유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내 감옥이야.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거.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남자를 만나고, 결국엔 아빠 회사를 물려받는 것까지. C사, H사… 그런 브랜드들이 나를 증명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가두는 울타리일 뿐이야. 나는 그냥… ‘진성정밀’ 최진석 회장의 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처음으로 드러낸 그녀의 진심에, 민재는 잠시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껍데기 안에 숨겨진, 그와는 다른 종류의 결핍과 갈증.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SCENE #2 같은 장소. 서로를 알아가다
“그럼 너는,”
이번엔 민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뭔데?”
민재의 질문에 유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것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모르겠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그냥… 내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 없이, 그냥 최유나 자체로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해.”
그녀는 민재를 바라보았다.
“너처럼. 너는 네 머리랑 배짱만으로 세상이랑 싸우잖아. 그게 부러웠어, 솔직히.”
민재는 그녀의 솔직한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저 닭 날개 하나를 더 그녀의 접시에 놓아줄 뿐이었다. 어색하지만 따뜻한 침묵이 흘렀다.
“너는… 왜 그렇게 돈을 벌고 싶어?”
유나가 다시 물었다.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돈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거나, 누구에게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삶. 그게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야.”
민재의 대답은 담백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유나는 그의 눈에서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닌, 존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절박함을 보았다.
SCENE #3 치킨집을 나온 귀갓길
밤공기가 시원했다. 어색했던 첫 만남과 달리,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버스 정류장이었다.
민재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내 시세를 확인했다. 여전히 기분 좋은 붉은색 그래프.
“신기하다.”
유나가 그의 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저 숫자들이 그냥 돈으로만 보였는데, 이제는 네 말이나 생각처럼 느껴져.”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면, 너도 재능 있는 거야.”
민재가 무심하게 툭 던진 칭찬에 유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 멀리, 강남으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세계였다.
“나 저거 타야겠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가 산다고 했는데, 결국 네가 계산했더라?”
민재가 계산한 것을 뒤늦게 알아챈 유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내 가설 증명 축하 파티인데, 내가 내야지. 잘 가.”
민재는 쿨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녀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반대 방향, 신림동으로 향하는 자신의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는 처음으로 다른 세계의 문을 아주 살짝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세계 역시, 자신과 같은 종류의 결핍과 자유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0만 원으로 시작된 베팅은, 그에게 돈 이상의 것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처음으로 들었다.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기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상승하는 계좌 잔고와는 반대로, 두 사람이 사는 세계의 격차는 이제부터 더욱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