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정밀의 위기
[세 줄 요약] 미국의 대중국 희토류 제재로 '진성정밀'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낀 유나는 유일하게 자신의 말을 이해해 줄 민재를 찾아가 하소연하고, 민재는 투자자의 본능으로 위기 너머의 기회를 분석한다. 그날 밤, 아버지의 위기를 돕기 위해 밤새 리서치를 하던 유나는, 우연히 최진석 회장에게 민재가 찾아낸 '대체 공급처'의 존재를 노출하게 된다.
SCENE #1 2020년 9월 중순. 진성정밀 사무실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임원들은 최진석 회장의 사무실에 모여 긴급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오가는 것은 한숨과 고성뿐이었다.
[속보] 美 백악관, “中 희토류 무기화 대응”... 첨단산업용 특수 희토류 12종 수입 관세 200% 인상 및 동맹국 외 수출 통제 행정명령 발표
뉴스 속보가 회의실의 대형 TV 화면에 떠 있었다. 진성정밀의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춘다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재고 물량이 버텨봐야 2주입니다, 회장님!” “대체 공급처를 알아봤지만, 단가가 지금의 3배입니다! 이러면 팔수록 손해입니다!” “주가는 지금 개장과 동시에 하한가입니다! 이러다…”
최진석 회장은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생을 ‘실물’과 싸워온 그였지만, 국가와 국가가 부딪히는 거대한 지정학적 리스크 앞에서 그의 경험은 무력했다. 유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버지와 회사의 모든 '어른들'은 과거의 경험에 갇혀, 변화한 세상의 판도를 읽지 못하고 당황만 하고 있었다.
SCENE #2 같은 날 오후. 한국대학교 캠퍼스 벤치
유나는 이 답답함을 터놓을 곳이 없었다. 친구 세라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한태민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고민을 유일하게 '다른 관점'에서 봐줄 수 있는 사람, 즉 민재를 찾아갔다. 부탁이 아닌, 하소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빠 회사 큰일 났어. 뉴스 봤지? 중국 때문에 다들 난리야…” 벤치에 앉아, 유나는 힘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민재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희 회사에서는 지금 뭘 제일 걱정하는데? 원자재 가격? 아니면 공급망 단절?”
“둘 다지. 대체할 곳이 마땅치 않대. 찾더라도 너무 비싸고.”
“그럼 반대로, 가장 이득을 보는 곳은 어딜까?”
“…뭐?”
민재의 질문은, 모두가 '위기'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 위기 너머의 '기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유나는 다시 한번, 그가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잠깐만.”
민재는 유나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변수들이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투자자의 본능으로, 유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트북을 켰다. 이건 더 이상 유나의 하소연이 아니었다. 거대한 돈의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이었다.
SCENE #3 같은 장소. 다른 차원의 분석
민재는 미친 듯이 원자재 시세, 원/달러 환율, 그리고 호주와 캐나다 증시에 상장된 이름 모를 광산 업체들의 주가와 거래량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유나는 옆에서 숨죽인 채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찾았다.”
한참 만에 민재가 입을 열었다.
“미국이 그냥 중국을 때리는 게 아니야. 뒤로는 이미 대체 공급망을 확보해주고 있었어. 여기, 호주에 있는 이 중소형 광산 업체. 지난달부터 기관 투자자들의 거래량이 미세하게 늘었어. 미국의 연기금일 가능성이 높아. 아마 백악관과 비공식적인 교감이 있었을 거야.”
그는 유나를 위해, 혹은 진성정밀을 위해 분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돈 냄새를 맡은 투자자의 본능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환율. 이 사태로 원/달러 환율은 무조건 급등해. 너희 아빠 회사는 수출 기업이지? 장기적으로는, 이 환차익이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전부 덮고도 남을 수 있어. 이건 위장된 기회야.”
SCENE #4 그날 밤. 최진석 회장의 서재
유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민재의 분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위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밤을 새워, 민재가 알려준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리서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서툴지만 나름의 리포트로 정리했다.
다음 날 새벽, 잠시 서재에 들른 유나는 책상 위에 자신이 정리한 리포트를 올려두었다. 그때 마침, 밤새 회사에서 고민하다 들어온 최진석 회장과 마주쳤다. 그는 유나의 손에 들린 리포트의 제목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미중 희토류 분쟁에 따른 대체 공급망 및 환율 리스크 분석]
최 회장은 지친 눈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네가 이런 걸 다…?”
“아… 아빠 회사 걱정돼서, 그냥…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리해봤어요.”
최 회장은 말없이 리포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적힌, 자사의 구매팀에서도 막 보고받은 생소한 '호주 광산 업체'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꿈틀했다.
“너… 이 회사는 어떻게 아는 거냐?”
최 회장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이건 학생 수준의 분석이 아니었다.
유나는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대답의 일부를 내뱉고 말았다.
“아빠 회사 너무 걱정돼서…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친구랑 밤새 같이 알아봤어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SCENE #5 아버지의 의심, 혹은 호기심
최 회장은 유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네 친구? 어떤 녀석인데, 우리 회사 목숨 줄이 달린 원자재 공급처를 가지고 분석을 해?”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함께,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날 선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딸의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실력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애송이 대학생의 리포트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날카롭고 정확했다. 최진석 회장의 머릿속에, 딸의 뒤에 서 있는 '똑똑한 친구'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의문부호와 함께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