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플레이어
[세 줄 요약] 민재의 가설은 현실이 되고, '진성정밀'은 위기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는다. 최진석 회장은 딸의 리포트 뒤에 숨은 인물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유나를 떠보고, 유나는 민재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민재는 자신의 분석이 거대 자본의 흐름과 일치했음을 확인하며 짜릿한 희열을 느끼고, 유나와의 통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내비친다.
SCENE #1 며칠 후. 최진석 회장의 사무실
“회장님! 알아냈습니다!”
구매팀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긴급하게 작성된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호주 퍼스에 있는 ‘웨스턴 리소스’라는 광산업체입니다. 지난 분기부터 미국의 한 연기금이 대량으로 지분을 매입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비공식적인 교감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당장 접촉하면, 중국보다 15% 정도 비싼 가격이지만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최진석 회장은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웨스턴 리소스’. 며칠 전, 딸의 리포트에서 보았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애송이 대학생의 분석이라고 치부했던 내용이, 회사의 최고 전문가들이 밤을 새워 얻어낸 결론과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그의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환율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제부로 원/달러 환율이 1,200원을 돌파했습니다. 이 추세라면, 원자재 가격 인상분은 환차익으로 충분히 상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구매팀장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최 회장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는 단순히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보다,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본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외와 의심에 휩싸였다.
SCENE #2 그날 저녁. 유나의 집 거실
최 회장은 평소와 달리 일찍 귀가했다. 그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유나의 옆에 무심하게 앉았다.
“너… 그 리포트 말이다.”
“네? 아… 그거요.”
“같이 만들었다는 친구, 이름이 뭐냐?”
아버지의 돌발 질문에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강민재.’ 그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민재가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냥, 스터디 같이 하는 선배예요. 이름은… 김민준이라고. 근데 왜요?”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마 전 스터디에서 마주쳤던 평범한 선배의 이름을 둘러댔다.
“그래? 그 친구, 한번 보고 싶은데. 아빠가 밥 한번 사주게, 자리 한번 만들어봐라.”
“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선배 바빠요.”
유나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최 회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딸의 어색한 표정 속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SCENE #3 같은 시각. 민재의 고시원 방
민재 역시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웨스턴 리소스’의 주가가 하루 만에 30% 넘게 폭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달러 환율 그래프는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가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짜릿한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단순히 돈을 벌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쾌감. 세상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보이지 않는 손들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들과 같은 방향에 베팅해서 승리한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들어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나야.”
“…어, 민재야. 웬일이야, 이 시간에.”
수화기 너머 유나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해 있었다.
“뉴스 봤어?”
“응. 봤어. 네 말이… 전부 다 맞았어. 진짜 소름 돋아.”
“내가 맞춘 게 아니야. 돈의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었을 뿐이지. 난 그냥 그걸 본 거고.”
민재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철함과 달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유나야. 고맙다.”
“뭐가?” “네가 그때 나한테 그 얘기 안 해줬으면, 나도 이 판을 못 봤을 거야. 너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진 것 같아.”
처음이었다. 그가 유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것도 고맙다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수화기 양 끝에, 어색하지만 따뜻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관계가 ‘파트너’를 넘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변해가고 있음을, 그들은 말없이 느끼고 있었다.
SCENE #4 다시, 최진석 회장의 서재
통화를 마친 유나는 살며시 아버지의 서재 문을 열었다.
최 회장은 여전히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컴퓨터 화면에는, ‘웨스턴 리소스’의 주가 차트와 함께,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김민준’이라는 검색 결과가 떠 있었다. 평범한 학점과 대외활동.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다.
최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이놈이 아니야.’ 그의 직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정도 분석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은, 이런 평범한 학생일 리가 없었다. 딸의 뒤에 숨어있는 진짜 플레이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조용히 검색창에 새로운 단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투자…’
그의 집요한 추적이, 마침내 강민재라는 이름의 끄트머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 모르게, 최진석 회장의 집요한 추적이 민재의 존재를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