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시간의 대화, 실존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하여
여름휴가로 고향에 내려와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며 매번 함께 했지만, 사실 둘이서 만난 것은 10여 년 만이었다.
오전 11시에 도착해 새벽 2시까지 14시간 동안 목이 쉬도록 쉬지 않고 이야기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실존주의자와 허무주의자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가져다주는 허무와 무한함 앞에서 나는 기존의 실존주의자들의 답변을 빌려 쓴다 했다. 그것이 평생을 바쳐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민한 이들의 결과이며, 내가 아무리 애써도 가닿지 못할 바에는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 그리고 그 대답은 (뻔하지만) 주어진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그 안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친구는 생각이 달랐다.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했다. 결국 삶의 끝은 죽음이며, 오늘의 내가 충분히 행복하다면 내일은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간편한) 죽음 선택 버튼이 있어서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했다.
온전히 받아들인 나의 생각이 아니라 충분히 설득력 있게 풀지는 못하겠지만 그 친구는 죽음의 허무에, 나는 삶의 순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연찮게 이번에 실존주의자 까뮈의 <이방인>을 챙겨 왔더랬다.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고른 이유는 오후 3시의 ‘찌는 듯한 태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렬한 태양 아래 있으면, 뫼르쏘의 살인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다시 그를 만나보고 싶어 지니까
슬프게도 내가 책을 읽던 날은, 흐렸다. 아니 호우주의보가 내릴 정도였다. 오전 일찍 책을 덮고, 여전히 남아있는 애매모호함을 정리하려 여러 해석을 뒤져 읽었다. 그리곤 가만히 누워 내리는 비를 보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실존주의자들이 ‘왜 사는가’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기 위하여 “삶을 비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례로 갑자기 커다란 ‘바퀴벌레’가 됨으로써,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사회에 받아들여짐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
또는 나의 삶에 ‘죽음’을 가져와보는 것. 1) 엄마의 죽음, 2) 나의 살인, 그리고 3) 나의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의미의 바퀴벌레, 즉 ‘이방인’이 되어 다시금 삶과 여름의 일상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것.
발바닥 아래의 바닷물과 여름밤의 냄새에 대해 떠올려 보는 것
어쩌면 삶이란 주어진 것, 당연한 것으로 이러한 ‘뒤틂’ 없이는 우리의 굳어진 사고를 자극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삶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그 어떤 것 보다 강력하게 지니고 있기에, 아무리 죽음에 대한 허무에 빠진다 하더라도 쉽게 굴복하기 어렵다.
알베르 까뮈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왜 자살하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어진 생에 최선을 다해 살며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