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배우시면 됩니다X 이러면 저렇게 되는 것 같아요O
이번 여름에 일본어 능력시험 JLPT N1급을 취득했다. 이로서 일본어가 한국어, 영어, 독일어에 이은 대학 입학이 가능한 네 번째 언어가 되었다.
어쩌다 갑자기 일본어요?라고 하면 갑자기 내 인생에 일본 장르가 드리프트 하고 갑자기 길을 막으면서 끼어들어서... 인생에 독일어라는 악성코드를 없애고 나니 뇌가 좀 심심해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나 보다. 여하튼 그래서 열심히 덕질했더니 JLPT N1급이 따지더라. 2008년에 N도 붙지 않은 구 2급 취득 후 15년 만의 일이었다. 여름이었다...
또 갑자기 내가 심심해서 프랑스어를 이번에야말로 배워보겠다는 의지로 갑자기 학습지를 샀거든? 근데 펼쳐보니 너무 막막한 거야? 그러면서 머릿속에 영, 독, 일에 어마무지하게 인생에서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는 것을 깨달았음. 그래서 뭐 내가 쥐뿔도 아는 건 없지만은 갑자기 이런 글 씀. 아는 것도 없고, 어떤 언어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하는 것도 어려운 수준임. 한국어는 그래도 조금은 제정신으로 하는 것 같은데, 그 외에는 잘한다고 하긴 어렵고, 그냥 나한테 필요한 만큼은 하는 것 같음.
뭔 소리 하고 싶은지 모를 테니 (사실 나도 모름) 일단 목차를 제공하겠음. 사실 3번 항목이 얘기하고 싶어서 1, 2번은 그냥 덧붙이는 내 자랑쯤으로 대충 넘겨도 됨.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언어를 배울 때 학습 단계에서 끝나지 말고 그 언어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놀 수 있는 레벨까지 어떻게든 끌어올리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임. 그래야 그다음부터 언어가 자생하기 시작함.
1. 현재 하는 언어들 소개, 어느 정도 하는가
2. 어떻게 그 외국어들을 배우게 되었는가 과정
3.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
1. 현재 하는 외국어들 소개, 어느 정도 하는가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의 네 가지임.
유럽언어기준(CEFR)이라는 게 있어. 이 단위에서는 언어 능력을 A1, A2, B1, B2, C1, C2의 여섯 단계로 나눔. 유럽 언어는 요걸로 나누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도 이걸 기준 삼아서 설명하겠음. 뭐 공식적인 설명은 알아서 찾아보시고, 일단 내가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는 구분은 다음과 같음.
A1: 인사를 잘할 수 있다.
A2: 슈퍼마켓에서 울지 않을 수 있다.
B1: 자기소개를 잘할 수 있다.
B2: 이제 그 언어 독학이 가능하다. (보통은 이 레벨 즈음~C1에서 대학 입학 자격이 내려짐)
C1: 그 언어권에 던져둬서 곤란할 일은 없으시겠네요.
C2: 우와 공부 어떻게 하셨어요?
공식 기준은 알아서들 찾아보시길. 여하튼 내가 하는 네 가지 언어의 수준을 간략히 소개하겠음. 난 통역이나 번역할 정도로 완벽하게 하는 외국어는 하나도 없음 ㅋㅋㅋㅋ 한국어도 잘 못함.
한국어(C2): 모국어, 어느 정도 하는지 알고 싶으시면 브런치 글을 정주행 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영어(C1):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외국어, 어느 정도는 함. 엄청 기가 막히게 잘하진 않고 뭐라는지 모르게 하거나 논리적 비약이 심하거나 문법 틀리거나 맨날 그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필요한 만큼은 함. 시험 성적이 절대적인 언어 사용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시험들을 굳이 언급해 보자면 토익 960, 아이엘츠 제너럴 7.5 (8.5, 7.5, 7.0, 7.0) 정도였음.
독일어(C1): 독일 6년+ 거주, 1년 차쯤 B2 따고 그 후로 데굴데굴 굴렀으니 C1을 딸 수 있다는 생각은 있는데 시험을 보지 못해서 공인 어학 성적은 B2가 최종임 (...) 2014년에 DSH 1, TestDaF 전 영역 3, Telc B2 취득 후 2020년 독일을 떠남. 그리고 더럽게 못하는데 왜 C1...?
일본어(B2~C1): 그냥 오타쿠로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중, 고등학생 시절에 애니메이션 열심히 보다가, 그 후로 아주 조금 배웠다가 매우 오래 손 놓았다가 갑자기 덕질이 인생에 끼어들어서 다시 잡음. 일본 가서 큰 문제없이 헛소리나 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고 의사소통 할 정도까진 되는 것 같음. 제대로 학습하거나 살거나 한 건 아니라서 일상적이거나 맥락적인 부분들에 대한 이해도는 많이 떨어짐. JLPT 1급에 해당하는 CEFR 레벨이 B2라는 데도 있고 C1이라는 데도 있어서 모르겠어서 둘 다 썼음.
근데 영어는 웬만한 모든 주제에 대해서 모르는 단어가 좀 있을지언정 다 얘기할 수 있는데, 나머지 두 언어는 영어에 비하면 많이 떨어져서 그건 안 됨.
2. 어떻게 그 외국어들을 배우게 되었는가 과정
한국어: 그렇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 대학을 졸업함. 아 참고로 나 대구 출신인데 서울말도 완벽하게 한다. 인생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사투리 안 쓰시네요'인데 사실 그냥 대구말을 못 하는 듯... 대구 친구한테 대구 말 못 한다고 까인 적 있음... 어흑
영어: 11살 때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갔다. 나이 나오네. 그리고 반지의 제왕 덕질 진짜 열심히 함. 영화 반지의 제왕-뮤지컬 캣츠 루트를 타면서 어느 정도 기초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열심히 들을 때 영화 대사 외우고 영화 내용 외우고 그랬는데 영어 자체를 못해서 막 잘 하진 못했고, 그냥 들을 수 있는 귀 정도는 트인 듯. 그리고 뮤지컬 캣츠를 통학시간에 전 앨범을 1회씩 돌려 듣고 깡그리 외우고 따라 부르면서 발음 연습도 어느 정도 하게 됨. 그 후로는 독일어를 배우면서 아 나 사실 영어 잘했네!!! 하는 자신감이 붙고, 독일에서 영어만 하면서 사는 기행을 저지르고, 독일에서 석사과정도 영어로 진행했음. 요새는 영어가 그렇게 어렵진 않고 독해도 많이 빨라져서 그냥 영어로 보고 듣고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서 큰 어려움은 없고 더 친숙한 것 같음. 한국어에 비하면 더럽게 못함.
일본어: 초, 중, 고등 시절에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봤다. 애니메이션 보고 만화 보면서 히라가나 가타카나 좋아하는 작품에 관련된 글자 한 자씩 따라 쓰고, 기억에 남는 대사 한 두 줄씩 계속 외우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테니스의 왕자가 재밌었으면 테니스,라고 따라 써보고, 프린세스 츄츄 보고 저와 함께 춤춰요, 나는 당신의 프리마돈나. 이런 임팩트 있는 거 하나씩 외우고, 너무 멋있어 보이던 노래 가사들 출력해서 뜻도 모르고 (뜻도 같이 프린트했는데 귀찮아서 안 읽었음 ㅋㅋ) 달달 외울 때까지 전부 다 싹 다 외웠다. 그러다 보니 그냥 하게 되었다. 언어에 관심은 있었어서 구몬 학습지 하거나 대학에서 기초 교양강의 듣거나 정도는 했었음.
독일어: 이 얘기를 꺼내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일단 고등학교 때 한 학기 동안 제2외국어로 배웠는데 중요 교과목이 아니라서 진도도 크게 나가지 않았고, 수능 때도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택해서 봤다. 대학에 들어가며 독일어 기초교양강의를 듣고 (외국어를 교양강의로 듣지 말자는 교훈을 얻음), 1년간 주말마다 독일어 학원에 다니는 지금 생각하면 열정을 불태우다가, 2학년 때 독어독문학과로 진입. 독어독문학과 다니면서 독일어 어학원도 대학 시절에 다녀서 졸업 전까지 B2까지 수업을 듣고, 졸업 후 독일에 가서 어학원을 다녔다. 그때는 B1부터 다시 시작했음. 그래서 B2 자격증 간신히 따고 영어 과정으로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냥 때려치움. 근데 취업하고 나니까 다들 독일어를 쓰네? 눈물이 앞을 가려... 혼자 꿋꿋이 영어 했지만 뭐 여하튼 살던 깜냥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하게 됨. 독일어는 진짜 덕질할 게 없거든? 내가 10년 넘게 덕질거리 찾아서 정말 헤매고 다녔는데 30분 동안 아이패드 마술 하는 마술사 아저씨 유튜브 영상 찾아본 거랑 (트릭이 다양하지 않아서 30분 후에 질림), 노래하는 뮤지컬 배우 한 분 은은하게 좋아했던 것이 다였다. 뮤지컬(엘리자벳, 모차르트, 뱀파이어의 춤)이 그나마 괜찮았고 나머진 눈물 나니까 말을 줄일게.
한 마디로 일본어는 공인 공부를 거의 거치지 않은 언어, 독일어는 공인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언어임.
3.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
독문과 시절에 우리 교수님이 '언어를 배우는 건 창문을 내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어. 그 자체로는 크게 이득이 되지 않지만, 그 창 밖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를 볼 수 있대. 음, 저기에는 사과나무가 있구나. 하고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사과를 딸 수 있는 그런 거라고 하셨어.
프랑스어를... 작년 설에 A1.1 인강 듣고 때려치웠었거든. 언젠간 배워야겠다고 계속 생각해서 최근 학습지를 샀는데, 이 걸 1년 동안 잘 따라오면 B1을 딸 수 있대. 그래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는데, 발음부터 시작하고 읽는 법 시작하고 내 이름은 XX입니다를 배우기 시작하니까 와... 진짜 너무 재미가 없고 너무 돌아버리겠는 거야. 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저는 한국인입니다. 만 알아서는 외국어 화자 앞에서 재롱떨 때 말고는 쓸 데가 없잖음? 그래서 맘이 급해서 몇 시간을 학습해야 어느 정도 레벨에 이를 수 있는지 찾아봤는데... 그러면서 갑자기 내가 인생에 영, 독, 일에 그저 노출되어 있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느꼈음. 영어 모국어 화자가 프랑스어 C1 레벨 달성하는 데 700~800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해. 참고로 영어 화자가 한국어나 일본어 저 레벨 달성 하는 데는 220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함. 여하튼 그러니까 난 저 각각의 언어를 정말 최소한으로 잡아 그 시간 이상 학습한 거고, 사실상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을 거임.
그런데 언어가 자생하기 시작하는 레벨이 있음. 모르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언어만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해지는 지점.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아주 조금 더 많아지는 레벨. 언어는 어느 레벨을 넘어서면 자생하기 시작함. 내가 만약 지금 와서 영어, 일본어, 독일어를 조금 더 공부하거나, 시간을 조금 더 투자하고 싶어 진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 나라의 노래를 고르고, 내가 읽어본 작가의 독일어 원어 판본 책을 고르고, 내가 마르고 닳도록 본 영화를 고를 것임. 하지만 내가 베트남어, 태국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고 싶어 진다면 서점에 가서 XX어 첫걸음, XX어 XX 완성 같은 책을 고를 확률이 조금 더 높을 것임. (아 물론 그런 기초 서적도 봐주는 게 좋긴 함 ㅠ 내 언어가 근본이라곤 없는 이유이기도 함... 그런 거 안 봐서...) 지금 내 프랑스어는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올 수가 없음. 제목조차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인강을 열심히 보는 것뿐임. 배운 게, 아는 게 없어서 책을 골라잡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뽑아들어도 현재 수준에선 98%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안 들릴 텐데 이 수준에서... 그냥 그 영화를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할 자신이 있는 거 아니면 그냥 얌전하게 가르쳐주는 거 배우는 게 나음. 진짜 적어도 60%는 알고, 저 문법이 어떤 의미인진 정확히 모르더라도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아야지 좀 찾아보고 배우고 하지. 그리고 이 '학습의 기간' 동안에는... 재미가 없음. 다른 암기공부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음. 아직 그 언어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레벨이 되지 못한 시점에 암기를 할 때는 정말 더럽게 재미가 없음.
하지만 언어가 자생하기 시작하면, 알아서 굴러가기 시작함. 내가 하고 싶어지는 말들이 있고, 내가 읽고 싶어지는 글들이 있고, 그 글에 그 언어로 접근하는 것이 당연해지기 시작함. 결국 외국어를 한다는 건 그 언어가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음. 그 언어가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그 역치를 넘기지 못한다면, 언어는 자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학습이나 공부 같은 방식으로, 마치 명절에 한 번씩 대면해서 할 말이라곤 없어서 '졸업은? 결혼은? 직장은? 연봉은?' 묻는 어색한 가족관계 같은 것이 되지 않나 싶어. 그 언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하는 것. 한번 대단히 몰입해서 외국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들어놓고 나면, 그 후에 유지해 나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것 같음.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손 놓더라도 내 15년 만에 다시 하는 일본어처럼 다시 따라가기가 쉽고, 그동안 그 언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이고 들린 것들도 생각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써 봤어. 요새 외국어 말고는 별로 하는 것이 없어서 이거라도 좀 자랑해보고자 써 봤는데, 내가 주제넘었을 수도. 내가 모르는 게 산더미만큼 많을 수도. 아무것도 모를 수도. 그럴 수도. 글에 대한 불만은 접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