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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Sep 03. 2020

이혼과 결혼 사이에서  1

첫째 날

자신의 권위에 도전을 한 대가로 그는 생활비로 사용하고 있는 '카드'반납에 대한 요구를 했다.

그리고 차를 사는데 한 푼도 보태지 않은 대가로 차키도 가져갔다.

거친 언행에 아이들은 웃음기가 사라져 경직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아이와 가정에 올인한 대가로 단 두 가지가 없어졌을 뿐인데 내 삶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치사하게 그런 방식으로 가정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유치한 행동보다는 

단 두 가지 조건에'아무것도'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드러난 나의 존재에 대해 화가 나 몸이 달아올랐다.

눈물이 나는 대신 분노와 부끄러움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 안에 평안함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감정을 계속 가라앉히고 연신 올라오는 감정을 꿀떡 삼키며 아이들에게 차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고,

담담하게 최악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했다.


둘째 날

하루를 버텨냈고, 아침이 찾아왔다.

아프지 않았지만 몸은 여전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에어컨을 틀고, 얼음물을 밤새 들이켰지만 좀처럼 정상 체온을 찾기 힘들었다.


내 안에 침입한 불안감, 분노, 좌절, 슬픔, 배신감 등의 힘든 감정과 싸우느라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습도 99%의 축축한 공기를 가르고 버스정류장으로 뉘엿뉘엿 걸어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엄마의 무능함이 미안했고, 쪽팔렸다.

천천히 올라가는 그 길엔 아이들의 친구를 학교로 실어 나르는 차들이 연신 지나갔다.

-

472번 버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 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8살 둘째가 우산을 가지고 버스를 탄다면 내릴 때 버벅거릴 것이 분명하다. 

잠시 갈등하다 우산을 가지고 걸려 넘어질 것이 걱정되어 우산 없이 보내기로 결정했다. 

시간 맞춰 도착한 버스에 아이가 올랐다. 카드를 대자 '잔액이 부족합니다' 안내 멘트가 들렸다.

지갑을 뒤져 버스비를 찍어주고, 아이를 태운 후 의자에 앉는 아이를 찾는 사이 버스는 지나갔다.

버스는 나의 얼굴에 매연을 뿜으며 지나갔고, 아이를 태우느라 우산을 접었던 머리엔 비가 내렸고, 얼굴은 또 달아올랐고, 아이들이 사라지자 이젠 자유롭게 눈물도 흘렀다.

-

그가 싱크대에 먹다 쳐 넣어버린 퉁퉁 불은 라면을 쳐다보았다. 단단하게 굳어져 온전한 모습을 하다 널브러진 모습이 나처럼 느껴졌다.

희번뜩대며 한껏 조롱하던 그의 눈빛과 손가락질, 입 모양이 온종일 머릿속에서 번쩍거렸다.


#셋째 날

시간은 버티는 것.

모든 상황은 동일했으나 마음은 어제와 달랐다.

불덩이 같던 몸은 36.5를 용케 찾아냈다.

그가 집을 나가겠다고 짐을 쌌다가 다시 풀어헤쳐 못된 짓을 해놓은 방에 옷가지들을 예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주변을 정리하고 밥을 먹으니 딱 아이들을 위한 저녁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생겼다.  


나는 살고 싶은 걸까? 이혼하고 싶은 걸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걸까? 복수하고 싶은 걸까?

나는 자신이 없는 걸까? 나는 결혼생활 이대로가 좋은 걸까?

대답은 내가 해야 했지만 나도 알지 못하는 질문들이 종일 머릿속을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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