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지나, 비를 뚫고, 우박을 맞으며 산을 탄다. 말을 타고.
낙마 사건 이후 난 말을 타는 게 더 무서워졌다. 말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특히 절벽을 따라 걷거나 내리막길을 가는 길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내가 끈기가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야생의 한 복판. 돌아갈 길이 없었고, 돌아가는 길 마저 말을 타야지만 가능했다. 결국 나는 둘째 날, 다시 용기를 내서 말 위에 올랐다. 그래도 첫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녀석이 무리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게끔 조금은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날은 5시간 정도 말을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출발을 했음에도 여정길은 전날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 언덕을 오르내리고, 오르내린 언덕만큼 다시 내리막길을 가야 하는 코스가 이어졌다. 한참 걷고 있자니 절벽을 낀 외길이 나오기도 했고, 말을 탄 채 흐르는 강을 건너기도 했다.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자니 잠시 쉬는 동안엔 손가락 마디마디가 단단하게 부어있었다.
내가 워낙 힘들어했기 때문에 잠깐 쉬는 타이밍에 다른 일행이 말을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내 말이 힘이 세고 고집이 세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면 그녀의 말은 훨씬 온순하고 말을 잘 듣기 때문에 타기가 수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제 조금 익숙해진 말 대신 새로운 말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가이드에게 말을 바꿔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의외로 가이드는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 이유는 내 말의 경우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녀석인데 반해 다른 일행의 말은 크기가 작아 덩치가 큰 나를 잘 태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된 모양이다. 그 얘길 들으니 나도 수긍은 가는 터라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 1시간만이라도 바꿔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바꾸기로 했다. 결국 나는 페라리를 보내고, 일행의 황색 말을 타게 되었는데, 왠지 안장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확실히 (나의) 페라리보다 힘이 약하다는 게 느껴져 후회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행의 배려를 무시할 수도 없고, 시도해보자마자 포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한번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출발했다.
하필 그 직후에 시작된 코스는 지금까지의 여정 중 만난 첫 번째 절벽길이었다. 왼쪽은 경사면이, 오른쪽은 가파른 (최소한 내 기준에서) 절벽이 있었고, 그 사이의 외길을 따라 한 줄로 이동해야 하는 구간이었다. 난 고소공포증이 있는 편이라 높은 곳에 잘 올라가지 못하는데, 절벽을 따라, 그것도 지면에서 1.5미터 이상 높이에 있는 말 위에서 이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조금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애써 괜찮은 척, 마음을 다독이며 이동하는데, 출발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무언가가 머리 위 헬멧을 때렸다.
'투둑.. 투둑'
의아함에 하늘을 보는데, 하얀색의 무언가가 떨어진다. 우박이다. 맹세컨데, 살면서 본 우박 중 가장 큰 사이즈가 아니었을까. 조약돌 정도의 크기를 가진 우박이 하늘에서 내리며 우리의 머리를 때렸다. 우리 모두 헬멧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박이 때리는 타격감이 헬멧 너머까지 전달되어 얼얼할 정도였다. 문제는 우박은 사람만 공격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우박과, 그 우박으로 인한 통증을 느낀 말들은 겁에 질린 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한 줄로 잘 가던 말들이 갑자기 행렬을 흩트리기 시작했다. 어느 말은 달려 나갔고, 어느 말은 외길로 가는 게 답답했던지 오르막길을 올라 앞의 말을 추월했다.
내가 탄 말도 당연히 겁에 질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는데, 앞이 다른 말에 의해 막혀 있자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그 말이 오르막길을 향해 갔으면 덜 무서웠을까? 내가 탄 말은 겁도 없이 절벽 쪽에 몸을 붙이며 달려 나가려고 애썼는데, 한 발만 삐끗해도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질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내가 아무리 고삐를 잡아당기고 소리를 질러도 녀석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지는데, 먼저 자신의 말을 진정시킨 가이드가 이내 당황한 말들을 몰아 절벽의 한 지점, 평평한 지대에 무리를 모았다.
마부의 도움을 받은 나는 도망치듯 말 위에서 내려왔다. 손이 제 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고백하면 난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 여행이 진심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 통제가 어려운 말, 그리고 험한 코스.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하던 마음은 '정말 끝까지 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고, 가능하다면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다.
말들이 좀 진정하고 난 후, 가이드는 우리를 불러 모아 우비를 나누어주었다. 우비를 나누고, 각자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것을 골라 입는데, 무섭게 내리던 우박은 조용히 우리를 덮쳤던 것처럼, 또 조용히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해 강한 물줄기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투어 중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시키며 너무 겁내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우비를 옷 위에 걸치고 난 후, 나는 다시 페라리의 등을 빌리기로 했다. 다만, 여전히 겁에 질린 상태의 나는 도저히 절벽길을 계속 가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손이 계속해서 떨렸기 때문에 고삐를 제대로 쥘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다행히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챈 이번 여행의 책임자이자 몽골인 가이드인 '바가'가 나를 대신해 고삐를 쥐며 우선 자기가 말을 몰겠다고 했다. 배신감이 떠오를 정도로 페라리는 바가의 손아귀에서는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었다. (결국 2종 보통인 내가 문제인거지 뭐..)
그렇게 또 30분을 이동했다. 바가는 내 고삐를 쥐고 자신의 말과 내 말을 통제하며 절벽길을 걸어주었는데, 절벽 아래를 보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고, 이동하는 중간중간 내게 괜찮은지도 물어봐주었다. 함께 여행을 한 일행들도 하얗게 질린 나를 걱정해 주고, 또 다독여주었다. 당시엔 패닉상태인 나를 돌보느라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다들 나의 안위를 걱정하며 따스하게 지켜봐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나도 어느 정도 진정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절벽이 끝나고 다시 평지가 시작되면서 나는 바가에게 고삐를 쥐어보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난관은 이어졌다. 특히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말을 탄 채로 산을 타야했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아니라 해리포터 속 '죽음의 숲'같은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산을, 비 오는 와중에, 말의 등에 업힌 채 말이다.
산을 오르는 일은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낙마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내리막길을 가는 것은 나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비로 인해 진흙이 되어버린 땅을 보니 더더욱 겁이 났다. 한 번은 직각의 가파른 바위를 내려와야 했는데, 바위 아래에는 말 한 마리가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지면이 있었다. 그 아래는 비탈길이 이어졌기 때문에, 난 최대한 내 몸을 말의 엉덩이 쪽으로 눕히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미끄러지고, 그대로 떨어지면... 2억인가...?'
(내가 든 여행자 보험의 사망 시 지급액이 2억이었다.)
너무 겁에 질린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이 모든 난관과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난 이번 여행 자체를 후회하진 않는다. 절대로. 난 유럽도, 미국도, 동남아시아도, 중동국가를 여행해 본 적도 있다. 럭셔리한 여행도 해보았고, 배낭여행도 해보았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에 적힌 오로라여행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몽골을 꼽을 수 있다. 단순히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번 여행은 나의 한계와 자연의 광활함,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좋은 에너지까지. 다른 여행에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여행을 마무리한 입장에서 솔직히 다시 같은 여행을 하라면 못한다. 이미 난 내가 말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을 결정했던 그 시점에, 내가 겁이 없었음에는 감사한다. 그 순간 '말을 타고 5일을 여행할 수 있을까?' 라든가 '말을 타고 절벽길을 걸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면 난 아마 이번 여행을, 나아가 지금 내 안에 채워진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과 새로운 사고를 얻지 못했을 거다. 늘 인생은 이렇게 약간의 무지와 무모함으로 다채로워지는 모양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부디 일행들에게 이 여행의 빌런이 내가 아니었길.
p.s.
사실 이번 여행동안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큰 무리 없이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유독 겁쟁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여행 내내 일행들은 지금보다 더 속력을 내서 달리고 싶어 했고, 코스 전체를 즐거워했다. 나만 낙마를 한 것도 아니었고,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음에도 다들 여행을 무서워하는 대신 즐겼다. 그러니 이 글로 인해 승마여행을 망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을 갔다는 사실에는 후회가 없으니 말이다.
p.s (x2)
하지만 사진 속의 여정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고, 난코스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코스에서만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갔던 길은 이것보다 훨씬!! 험했다!! 절대 내가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