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드벤처 1일 차, 낙마를 하다.
내가 신청한 투어는 5박 6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1일 차 오전, 몽골 시내를 관광하고 오후쯤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1박을 하며 1시간 정도 말을 타보는 경험을 했다. 2일 차 오전, 숙소에서 밥을 먹고 푸르공을 타고 본격적으로 오프로드를 시작했다. 2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우리를 기다리던 마부님들을 만나고, 각자의 말을 배정받아 본격적으로 말을 타기 시작했다.
"말을 탈 땐 왼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오세요."
"말을 멈출 땐 고삐를 배 쪽으로 당기세요."
"달리고 싶을 땐, 말의 배를 차면 됩니다."
"우리는 이동하는 내내 한 줄로 갈 거예요. 절대 줄을 이탈하지 마세요."
그렇게 30분 정도 간단하게 오리엔테이션을 하곤, 말 위에 오를 수 있도록 가이드와 마부가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리곤 고삐를 우리 손에 쥐어준다. 고삐를 쥐어준다. 고삐가 내 손에 쥐어졌다. 마부님이 고삐를 쥐어주곤 멀리 가버린다. 고삐가 내 손에 있다. 고삐가... 어...?
투어를 신청할 때부터 각자 말을 탈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매우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 어제 겨우 1시간 말을 탔는데, 그것도 그땐 현지인이 앞에서 내 말의 고삐를 잡고 그저 위에 올라타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말의 고삐를 쥐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말 위에 앉아 있는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고삐도 집어던지고, 말 위에서 뛰어내려 다시 안락했던 지난밤의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내 말은, 페라리는, 정말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등 위에 올라타거나 말거나, 고삐 쥔 손을 덜덜 떨면서 잡아당기거나 말거나, 페라리는 그저 다른 말의 무리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잡초가 더 무성한 곳을 향해 제 멋대로 움직였다. 말의 고삐를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어 당겨보지만, 오히려 내가 (감히 보통 2종 따위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성가신지 머리를 흔들고 푸르릉 거리는 바람에 고삐를 놓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게 조금은 겁에 질러 혼자 고군분투하는 사이, 가이드와 마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느라 정신없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 위에 올라가길 기다리는 동안 점점 무리에서 벗어나 멀리, 그저 멀리 잡초가 우성한 곳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야.. 왜 이래!! 얼른 돌아가자고!!"
그렇게 한국어 따윈 알아듣지도 못할 몽골말과 처음 말 위에 올라타 겁에 질릴 대로 질린 나는 한참을 실랑이해야 했다. 아니, 사실은 난 애원하고 그런 날 가볍게 무시한 녀석 사이의 일방적인 줄다리기였다. 결국 출발준비를 마친 가이드가 말을 타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와 나와 몇몇 다른 말들을 챙겨 다시 무리로 향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엔 커다란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나... 한국 돌아갈 수 있겠지..?'
여행의 2일 차, 그리고 말을 타는 일정의 첫날, 우리의 목적지는 최종 목적지를 가기에 앞서 중간지점인 첫 베이스캠프였다. 약 3시간 정도가 예상되는 일정이었다. 사실 첫날은 잔뜩 긴장을 한 채 이동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체로 평지를 달렸다. 다음날부터는 강과, 산, 절벽을 걷는, 좀 더 험난한 코스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에 비하면 첫날은 매우 쉬운 코스였음이 분명하나 처음 말을 탄 나에겐 매 순간이 어려움이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처음 한 시간은 말 위에서 계속 "어떡해.."를 외치며 불안에 떨었지만, 그래도 다음 두 시간은 "무섭지만 할 만해.." 정도로 바뀌었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쯤엔 말이 약간 속도를 붙이면 그럭저럭 고삐를 놓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한 햇빛 아래에서 20마리가 넘는 말과 20명 남짓의 사람이 일렬을 이룬 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어쩌면 난 첫날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여행 전체를 즐겁게 달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첫날, 베이스캠프를 눈앞에 두고 낙마를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리의 첫 베이스캠프는 어느 작은 절벽 아래에 있는 평야였다. 평평한 지반에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가까이에서 흐르는 강도 있어서 여러모로 야외취침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출발할 때 가이드는 베이스캠프에 가까워지면 이미 같은 경로를 여러 차례 오간 말들이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말은 물론, 다른 말들도 베이스캠프에 가까워지자 이전보다 조금 빨라진 속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렬로 가야 하는 만큼 마음 놓고 달리진 못하더라도 걷는 속도보다는 조금 빠른 정도랄까? 여전히 무서운 마음은 남았지만 그래도 3시간 동안 말을 탔으니 어찌어찌 고삐를 쥐고 그 속도에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베이스캠프를 눈앞에 두고, 성격 급한 내 말은 약간 경사진 내리막길에서 굳이 속도를 내었다. 그러다 하필 진흙으로 된 경사에서 말이 내디딘 지면이 무너지며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할 겨를 없이 나 역시 녀석의 어깨 쪽으로 몸이 쏠리며 그대로 함께 고꾸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몸이 앞으로 쏠리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바닥에 닿았고, 반사적으로 팔을 앞으로 뻗어 바닥을 짚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말과 나는 바닥에 나란히 누워 버둥거리고 있었다. 말과 함께 땅에 엎어진 순간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출발 전 가이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발이 페달에 걸리면 자칫 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말과 함께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말의 뒷발에 차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도 순간적으로 스쳤는데, 다행히 말 역시 나와 함께 넘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므로, 말이 제대로 일어나 자리를 잡기 전에 나는 넘어짐과 동시에 우선 최대한 말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가이드는 물론, 함께 여행했던 일행들도 걱정되는 마음에 급하게 곁으로 다가왔지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솔직히 마음이 놀랄 겨를도 없었다. 사실 낙마한 순간에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낙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오히려 한번 낙마를 해보니 별거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이제부터 전보다 편하게 말을 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낙마 직후엔 오히려 나보다 말이 더 걱정되기도 했다. 어쨌든 난 아픈 곳 없이 멀쩡했지만, 녀석은 발이 미끄러졌으니 사람처럼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끗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녀석의 부상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가이드는 말은 아무 이상 없다고 이야기하며, 내 부상을 걱정해 주었다.
물론 아예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일행들에겐 애써 웃었지만 다리에 멍이 생겼고, 다음날부터 무릎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1주일 정도는 무릎이 계속 찌릿했다. 하지만 병원을 방문해 검사해 보니 큰 부상은 없었고 시간이 지나며 내 몸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이날의 낙마사고는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다들 걱정을 많이 해줘서 오히려 웃으며 괜찮다고 이야기하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원래 교통사고는 그 순간보다 후유증이 무서운 거라고 걱정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마저도 웃으며 들었는데, 생각해 보면 확실히 첫날 낙마를 한 것이 이후 말을 타는 내내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날은 3시간, 둘째 날은 5시간을 말을 탔고, 셋째 날은 두 번째 베이스캠프에서 1박을 하며 휴식. 그리고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다시 5시간과 3시간에 걸쳐 같은 길을 따라 말을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첫날의 낙마 이후 3일 동안 말을 더 타는 내내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동물도 사람이 그렇듯 얼마든지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것인데, 특히 절벽을 따라 걷고 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동안 말이 첫날과 마찬가지로 미끄러진다면 과연 그게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행이 계속될수록 고삐를 쥔 손에 힘이 점점 빠졌다. 첫날엔 그래도 고삐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면 마지막 날엔 고삐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몽골여행을 한 이유는, 그것도 이렇게 말을 타고 야외취침을 하는 일정을 선택한 것은 "몽골 초원을 달리는 칭기즈칸"을 꿈꿨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첫 어드벤처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첫날 낙마를 경험하고 난 이후, 이 여행은 어드벤처에서 그저 마지막 날, 한국까지 무사귀환을 바라는 '극한의 생존게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