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은 백수가 된 내가 한 주 중 유일하게 출퇴근 비슷한 걸 하는 날이다. 작년부터 맡고 있는 일이 있어 토요일 오전엔 부천에서 광진구까지 1시간 반 정도 지하철여행을 한다. 10시에 일을 시작하려면 집에서 8시 반에는 출발하는데, 오늘은 30분 일찍 출발해 구의역 근처의 유명한 콩나물국밥을 먹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어제 잠들기 전 내 계획은 그랬다는 거다.
아침 7시.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졸음이 가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데 반대편에서 언니가 울면서 강아지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한다. 정확히는 발작을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인다. 단번에 잠이 깼다. 올 것이 왔나 보다... 심정이 덜컹 내려앉는다.
우리 집 막내는 까만 털을 가진 푸들이다. 내가 15살이었던가? 언젠부터인가 언니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했고, 몇 달의 투쟁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 길거리에서 강아지를 파는 아주머니를 며칠 쫓아다니자, 며칠 후 아주머니는 강아지 몇 마리를 데리고 우리 집을 찾았다. 사실 언니는 내심 갈색의 수컷 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새까만 푸들이 겁도 없이 우리 밖을 뛰쳐나와 온 집을 휘젓고 다녔다. 한 손에 쥐어도 들어갈 작은 사이즈의 어린 강아지였다. 그날 우리 집에 막내가 생겼다. 어릴 땐 털이 너무 까만 탓에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여서 녀석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깜순이가 되었다.
깜순이는 그 후 19년을 우리와 함께했다. 필리핀에서 입양을 했고, 이후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한 글로벌한 강아지다. 우리는 필리핀에서 2층집에 살았는데,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깜순이는 워낙 작아 계단을 오르지도 못했고, 내려오다 구르는 일도 있었다. 1년이 지나자 계단쯤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올랐다니며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한 번은 집에 도둑이 들 뻔한 일이 있었는데, 하필 도둑의 진입로가 내 방 창문이었다. 한 밤중에 창문을 보며 짖는 깜순이를 다그치며 잠든 일이 있는데 (난 허공에 짖는 게 귀신 때문인 줄 알았다.) 그때 깜순이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알 수 없다. 5살이 넘을 무렵부터는 치아가 상하기 시작해 지독한 입냄새가 났는데, 침벅벅의 뽀뽀를 견디는 게 힘들던 시기도 있었다. 7살이 넘을 쯤엔 결국 치아를 모두 빼야 했는데, 치아관리를 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던 무지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15살까진 꽤나 건강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눈동자가 안 보이던 까만 털이 조금씩 하얗게 변했다. 15살을 넘어설 즈음에 슬개골 탈구 진단을 받았고, 다리힘이 약해지긴 했어도 제법 씩씩하게 지내던 녀석이 작년부터는 확실히 잠만 자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다 올 초, 외할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3일간 집을 비워야 했는데, 처음 2일은 강원도와 부천을 오가며 밤에만 깜순이의 곁을 지켰고, 마지막 날은 언니 남자친구에게 밤에만 이라도 집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깜순이가 이상증세를 보인건 마지막 날이었는데,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언니 남자친구가 연락을 했고, 결국 우린 마지막 날, 발인까지 자리를 지킨 뒤 먼저 집에 왔다.
그날 밤, 깜순이는 자궁축농증 진단을 받았다. 당장 응급수술을 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병이었지만, 19살이라는 나이는 마취 자체가 위험한 나이였다. 해도 죽을 수 있고, 안 해도 죽을 수 있는 수술. 노견 중에서도 노견인 아이가 과연 마취와 수술, 그리고 회복을 견뎌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은연중에 수술을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언니와 나는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고, 새벽까지 대기실을 지키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릴 땐 그 어린 녀석의 배를 갈라야 한다는 게 무서워 피했고, 10살이 넘어서부턴 노령견이라 수술이 무서워 피한 수술이었다. 어린 강아지에겐 그저 간단한 수술인데, 왜 진작 해주지 않았는지 자책하는 밤이었다.
감사하게도 깜순이는 마취에서 깨어났고 잘 회복했다. 전보다 기운은 없었지만 산책도 하고, 의사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호박죽도 잘 먹었다. 그렇게 수술 후 잘 견뎌내는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기특할 수 없었다. 그렇게 2월 초에 한 수술 직후 다시 걷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는데... 지난달부터 자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집안 곳곳에 소변을 보고,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벽이나 가구에 머리를 박는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 슬픈 일이지만 이젠 정말 이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처음을 발작증세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는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가르는 빨간 버튼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최근 너무나도 약해진 그 작은 생명체를 보며 언젠가는 그 버튼을 눌러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다. 너무나 연약해진 생명을 바라보며 연명을 위한 치료가 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난 한 때 동물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난 그저 고통 속에 목숨이 연장되는 사례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이별을 선택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걸까? 이 작은 생명체는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아침 언니가 전해온 소식은 처음으로, 내 눈앞에 그 빨간 버튼이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일을 취소할 순 없었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 먼저 본가로 갔다. 혹시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까 봐. 그렇게 만난 깜순이는 너무 연약했다.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돌았다. 울면서 품에 안으니 얌전히 품에 안긴다. 내게 기대 오는 그 무게는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연락해 오늘 일을 모두 취소하고 그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감정적으로 행동하기엔 이제 책임감의 무게를 진 나이가 되었다. 30분 가까이 울었더니 집을 나설 때쯤엔 눈이 퉁퉁 부었다. 지하철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마지막으로 본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을 1차적으로 마무리되고 3시쯤 집에 전화를 하니 다행히 깜순이가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식사를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평소라면 여유 있게 있는데 오늘은 시간을 빼기도 힘든데..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데. 안 당장 다음 주에 연락이 안 되는 곳으로 1주일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3주 후에는 본가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 마지막을 함께해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오늘의 사건은 내 마음속에 그 작은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언니가 이제 많이 안정을 찾아 밖에 잠시 산책 겸 나왔다고 했다. 게다가 아직 5시간은 더 일을 해야 했다. 결국 뭔갈 먹긴 해야겠어서 평소에도 자주 들렀던 갔던 건대우동집을 갔다. 이곳은 원래 비빔국수 맛집이다. 매주 일하는 중간에 점심으로 비빔국수를 사 먹는 게 토요일의 낙이었다. 하지만 오늘 내게 필요한 건 내 마음을 위로해 줄 따뜻함이었다.
따뜻한 수프는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정확히는 코르티솔 수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인데, 14일간 매일 1번씩 수프를 먹은 실험집단에게서 코르티솔 수치가 감소하는 것이 관찰되었고, 나아가 감정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가 있다. 실제로 나에게도 효과가 있었는지 잔치국수를 비우고 난 후에서야, 오늘은 이별하는 날이 아닐 수 있겠구나 하는 희미한 안도감이 들었다. (언니가 산책도 시키고 이상행동도 멈췄다는 얘기를 전해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가 돈을 벌겠다 다짐한 건 깜순이가 슬개골 탈구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한쪽 다리를 수술하는 데 150만 원이 든다고 했다. 다리가 4개이니 합치면 600만 원. 난 그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내가 순수하게 사랑을 말하려면 경제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에 강아지가 아플 때, 나아가 부모님이 아픈 순간이 올 때 "아무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선 돈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 몇 년을 열심히 일했고, 돈을 모았다. 최근에 한 자궁축농증 수술은 수술비와 입원비용, 검사비를 모두 포함 400만 원 정도가 나갔다. 그 순간 난 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 과거의 어느 날과 달리 그 비용을 기꺼이 낼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내게 알려준 새로운 사실은 비용뿐 아니라 시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유. 전보다 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지만,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기에 아픈 가족을 두고 일을 하러 곁을 떠나야 했다. 그 마음은 몇 년 전, 슬개골 탈구 진단을 받은 가족의 곁에서 한숨 쉬던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 난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을 하나 더 배웠다. 내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내 시간을 내가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기까지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솔직히 하루 한 끼 잘 챙겨 먹자 다짐한 일이 아니라면 오늘은 식사 자체를 거르고 싶었다. 글을 쓴다면 온통 내 슬픔이 덕지덕지 붙은 글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것도 같다.) 일은 내팽개치고 하루종일 곁을 지키고 싶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순간이 나를 더 눈물 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망설임 끝에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시간을 내어 오늘 나의 아침식사, 정확히는 첫 끼니를 기록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공공장소에서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올해는 외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이젠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해온 가족이 내 곁을 떠날 모양이다. 어른이 되는 것이 슬픈 이유 중 하나는 이별의 깊이가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이별은 헤어져도 다시 만나면 반가울 수 있는 종류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는 종류의 이별도 있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