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각도를 틀어보니(essay)
가끔 집에서 업무를 본다. 집 안에 따로 서재나 작업실이 없어서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 받침대와 키보드를 설치하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일과를 시작한다.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출근길에 받는 스트레스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또다른 장점이 있다. 바로 백색소음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재택근무 할때 자연스럽게 리모컨으로 손이 간다. TV나 유튜브를 켜놓고 업무를 보면 집중이 더 잘 되는 기분이다. (회사에서도 가끔 집중이 필요할 때 에어팟을 귀에 꼽고 일하기도 하는데 그마저도 눈치가 보여 금세 에어팟을 빼버린다) 집에서 백색소음을 즐길 때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 말그대로 백색소음이라 TV 화면이 보이지 않아도 되는데, 노트북 받침대가 TV를 가리는 것이 꽤나 신경이 쓰였다. 거실 테이블을 옮기자니 너무 무겁고, TV는 옮길 수 없고, 노트북 받침대 없이 일하자니 거북목이 걱정됐다. '어차피 보지도 않을 화면인데 좀 가려지면 어때'하는 마음으로 2년 가까이 그 위치, 그 자세를 고수했다.
그러던 어느날 노트북 받침대 아래 프린트가 끼는 바람에 노트북 받침대를 30도 정도 틀었다. 그랬더니 가려지던 TV 화면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각도만 조금 바꿨을 뿐인데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재택근무 동안은 탁 트인 TV화면의 백색소음과 함께 더 많은 업무를 쳐낼 수 있을 것 같다.
연말이 되니 회사의 어른들이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뽐낸다. 1년 동안 함께 으쌰으쌰 일해보자던 사람들은 평가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고, '저 사람이 왜?'라는 사람들이 고위직으로 승진하기도, '저 사람은 왜?'라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다."
<불안> 알랭 드 보통
꼭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기에 연말 회사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하고 착찹하다. 한두 해 겪은 일도 아닌데, 이보다 더 심한 일들도 겪어냈는데 매년 이 맘쯤이 되면 마음이 쓸쓸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어른의 겨울은 조금더 춥고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올 해부터는 내 마음의 각도를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나를 둘러싼 상황들은 대부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정 변수다. 무거운 거실 테이블, 벽에 박혀 있는 TV처럼 말이다. 억지로 움직이려다보면 내가 다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노트북 받침대 각도를 조금 틀어보고자 마음 먹는 것. 그러니까 회사를 보는 내 시선과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 작은 조정이 내 시야를 뻥 뚫어줄지, 아니면 더 걸리적 거리게 될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