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내가 너를 믿으면 (essay)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비교하게 된다. 같은 유치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는 물론이고, 인스타나 TV에 나오는 또래 아이들까지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이 비교 대상이 되고, 그들은 때로는 부러움, 때로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6개월에는 아이가 뒤집어야 한다, 돌이 되면 걸음마를 해야 한다, 두 돌이 되면 대화가 통하고 빠르면 기저귀까지 뗄 수 있다… 온갖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엄마들을 조바심 나게 한다.
이제는 초등학생이 된 아들을 키우며 지금까지 가장 크게 걱정했던 시기는 기저귀를 뗄 때였다. ‘아무리 늦어도 세 돌 전에 기저귀를 뗀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어서 만 3세가 되기 직전이었던 2020년 가을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부터 기저귀 떼는 연습은 시작했었다. 유아용 소변기를 화장실 문에 세워두고, 아들이 소변을 보고 싶어 할 때마다 억지로 아이를 소변기 앞에 세우고 쉬이- 쉬이-를 수도 없이 외쳤다. 소변을 보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너 몇 살인데 아직도 기저귀 차고 다녀.” “어린이집 친구들은 다 기저귀 안 한데…” “친구들이 OO이 기저귀 찬다고 놀리겠다! “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며 겁을 줬던 기억이 있다. 나의 조바심 때문인지 아들은 좀처럼 기저귀를 떼지 못했고, 누군가가 말한 세 돌의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더 급해졌다. 기저귀 떼는 것도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에 ’ 똥박물관‘에도 아이를 두 번이나 데려갔다. 자연스럽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걸 노출시키고 교육시켜야 아이가 놀이처럼 받아들인다는 꽤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 ’역시 내가 부족했구나‘를 되내며 똥박물관에 가서 열심히도 아이를 가르쳤다. 나의 뒤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여전히 기저귀를 떼지 못했다. 안달복달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때가 되면 다 하겠지. 그렇게 하면 더 안 해‘라는 속 편한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남편도 세 돌이 지나가면서부터는 걱정됐었다고 했다.)
기저귀 떼기, 기저귀 떼는 훈련, 기저귀 떼는 시기, 기저귀 떼는 법. 그 시절 나의 네이버검색창을 도배했던 키워드들. 검색해서 찾아낸 방법을 아이에게 적용해 보고 실패하고, 아이에게 화를 내고, 또 다른 방법은 검색해서 찾아내고. 서너 달은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마음속 데드라인이었던 세 돌이 되는 생일이 지나고 나서도 아이는 본인이 마음 내킬 때만 유아용 소변기에 조금의 쉬를 해줄 뿐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늘 괜찮다고 말해주시던 어린이집 선생님도 연말이 되면서부터는 조금 걱정이 되었는지 염려와 격려의 말을 알림장에 남겨주셨다.
아이가 기저귀를 못 떼는 이유는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우연히 남편이 ‘금쪽같은 내 새끼’에 우리 아이와 비슷한 사연이 있다고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 내가 다 해본 거야” “걔랑 우리 OO이랑 같니”. 방송에 나온 아이도 기저귀를 떼지 못했고,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촉감‘ 때문이었던 것. 촉감에 예민한 아이들은 엉덩이에 닿는 변기에 차가운 감촉이 싫어서 기저귀 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유레카. 아들도 변기에는 아예 질색을 하고 앉지를 않았다. 앉히면 바로 칭얼거리며 일어나거나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하면 울기를 반복했다. 촉감에 민감했던 거다. 그 이후 변기 위에 커버를 씌우고 변기에 앉히니까 일어나지 않고 곧잘 앉아 있었고, 그 이후로는 어떻게 기저귀를 뗐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수월했다. 밤기저귀만 차는 시기도 없이 말 그대로 ’한번에 딱‘ 기저귀를 뗀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어린이집 알림장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오늘은 OO이가 기저귀를 차고 오지 않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아서 친구들이 모두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어요. OO이 축하해!“
현재 나에게 ’기저귀‘와 같은 존재는 ‘혼자 학교 보내기’다. 기저귀의 교훈에 불구하고 나는 ’늦어도 3학년 되면 혼자 등하교 한다‘ ’빠른 애들은 1학년 2학기부터 혼자 가요‘라는 말에 휘둘리며, 아이에게 “이제는 혼자 등교해야지” “학원도 이제 혼자서 가 봐” “학원 끝나고 혼자 집에 와보는 건 어때?”라며 온갖 잔소리를 퍼붓고 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아직은’이라고 답한다.
오늘 아이를 등교시키는데, 갑자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을 거 같아. 혼자 가는 연습 해 볼게”라며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후다닥 뛰어갔다. ‘어? 이제 혼자 보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이를 슬그머니 따라갔다. ‘띠링’ 정문을 통과하면 오는 알리미 메시지가 울렸다. 그런데도 나는 불안해서 정문까지 가서 아이가 잘 들어갔는지, 건물까지 완전히 들어갔는지를 확인했다. 아이는 친구를 기다렸는지 정문을 통과하고 학교건물 앞에서 서성이다가 건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아이가 내 손을 놓고 가기 시작한 그곳은 학교 정문에서 50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거기서 혼자 가는 것도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왜 자꾸 혼자 가고 오라고 보챈 건지. 언젠가 기저귀를 마법 같이 뗀 것처럼 스스로 등하교하는 날도 자연스럽게 올 텐데. 그리고 아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닦달하기만 한건 아닌지. 심지어 혼자 간다는 아이를 믿지 못하고 따라간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정작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