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정의 대화

나는 내 아이의 유일한 엄마 코치입니다

by 밍이


나의 엄마는 매우 헌신적인 부모였다. 끼니때마다 갓 지은 밥이 식탁에 올랐고,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가득 찬 도시락은 늘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공들인 다림질로 언제나 빳빳하게 날이 선 교복 블라우스는 선생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엄마는 안전에도 민감했다. 내가 조금만 다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을 발라주거나 병원에 데리고 갔고, 귀갓길이 조금이라도 늦어질 것 같으면 혹시 내가 길을 잃고 미아가 되지 않을지 걱정하면서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감정을 받아주는 일에는 취약했다. 세상 사람들을 '마음이 단순한 사람과 복잡한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눈다면, 안타깝게도 엄마는 전자, 나는 후자였다. 엄마는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고 괴로워하는 상황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 딸은 왜 이렇게 예민한가...'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일로 속상해할 때 엄마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괜찮아. 별 거 아니야."였다. 그렇게 말하면 정말 별 거 아니게 된다는 듯이.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어릴 적부터 마치 손톱 밑의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던 느낌이 '감정을 수용받지 못한 아이 특유의 낮은 자존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화가 났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열심히 밥 차려주고, 교복 다림질해 줄 게 아니라 내 감정에 공감해줬어야지! 나를 다독이고 이해해 주었더라면, 나에게 '너를 온전히 수용한다'는 메시지를 주었더라면 내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잖아! 엄마는 부모로서 실격이야!


코로나 때문에 코칭에 발을 들이게 된 이후, 나는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생을 돌이켜보고, 그때 그때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던 공감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아이에게 '공감 잘해주는 부모'가 되겠어. 각종 육아서와 심리 서적들을 읽고, 코칭을 배우며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려고 노력했다. 되도록 자주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살피고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최근에 나눈 대화들을 복기해 보니, 내가 사오정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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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이가 우유를 달라고 했는데, 냉장고를 열어 보니 유통기한이 이틀 지난 우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괜찮겠지 싶어 아이에게 우유팩을 건넸다.


"엄마, 이거 유통기한 지났어. 딴 걸로 줘."

"('나는 감정 읽어주는 엄마야'라고 생각하며) 소망아, 우유가 상했을까 봐 불안하구나."

"응."

"('감정을 읽어주었으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겠지'라고 생각하며) 괜찮아. 유통기한은 유통기한일 뿐이야. 안 상했으니까 그냥 먹어도 돼."

"딴 거 줘."

"(감정을 읽어줬으니 부모로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귀찮아지면서) 아 괜찮아, 괜찮아. 그냥 먹어."

"......"


또 다른 날, 아이가 무언가에 다리를 긁혔다. 피가 살짝 배어 나오자 아이는 두려운 듯이 내게 말했다.


"엄마, 나 상처 났어. 밴드 붙여 줘."

"(감정을 읽어줄 기회라고 생각하며) 소망아, 상처가 나서 피를 보니까 무섭구나."

"응. 밴드 붙여 줘."

"(감정을 읽어줬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괜찮아. 피 금방 멈춰."

"밴드 붙여 달라고."

"(갑자기 귀찮아지며) 야, 그 정도 상처는 밴드 안 붙여도 돼."

"......"


아이는 안전 욕구가 강한 편이다. 위 두 상황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은 명백하게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우유'와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전과 건강을 부모인 내가 세심하게 살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감정을 수용받는 게 아니라.


반면 안전에 둔감하고 감정에 민감한 나는 내 방식대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감정 읽기'라고 단정하고, 아이가 정작 원하는 보살핌은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나는 나의 엄마와 같았다. 이렇게 가다가 아이는 자라서 '엄마는 내 감정만 집요하게 물어봤을 뿐 정작 나를 돌봐주지는 않았다'라고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엄마가 달리 보였다. 어쩌면 엄마도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받지 못해서 아쉬웠던 것을 내게 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엄마는 자식의 감정도 수용할 줄 모르는 둔한 부모가 아니라, 자식의 안전과 건강을 세심하게 살피는 부모였구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것, 그것을 살피는 것이 지금부터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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