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화

나는 내 아이의 유일한 엄마 코치입니다

by 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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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의 또 다른 부작용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화 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점에 비해 그닥 덜 중요하게 여겨지다 못해 아예 문제라는 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나, 나는 이것이 때로는 심각한 괴로움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성적으로 줄 세워서 대학 가는 시스템에서 부모라면, 선생님이라면, 내 아이, 내 학생이 조금이라도 앞줄에 서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열심히 해라.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어떤 일이나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과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수능을 대비해 열심히 공부했어도 시험 당일 병이 나거나, 시험장까지 가는 도중 교통사고가 나면 시험을 망칠 수 있듯이, 삶에서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노력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는 노력이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photo by sarah-dorweiler on unsplash


내가 이것을 절감한 것은 20대 후반 자격증 시험을 볼 때였다. 2차 시험을 보기 일주일 전에 갑자기 극심한 허리 통증이 찾아왔고 내 몸은 무너져 내렸다. 시험이 끝난 후에 전문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더니 퇴행성 디스크란다, 디스크 탈출이 아니고. 40대 후반에서 50대나 되어야 나타나는 증상이다. 나를 진찰한 의사 선생님은 혀를 내두르며 사람이 어떻게 살면 20대에 이런 허리를 가질 수 있냐고 놀라워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내가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이 망한 뒤로 나의 대학시절은 전쟁이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매일 왕복 4시간을 지하철과 버스로 통학하면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 번에 두세 개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 사이에 진로 방황을 하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전공도 두 번 바꾸고, 결국 전공과 전혀 무관한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수험기간에도 부모님의 원조를 거의 받을 수 없었기에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돈과 한 달에 드는 수험비용을 계산해 보고는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1차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매일 아침 8시에 독서실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책상 앞에 앉아 엉덩이도 거의 떼지 않고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수험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자 공부시간을 밤 10시 반까지로 줄이는 대신,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가능한 과외 자리를 찾아 아르바이트를 했다(그 시간에 하겠다는 학생을 찾느라 과외비를 싸게 불렀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그러면 좋은 날이 와.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 나를 갈아 넣는 생활 끝에 결국 허리가 망가졌다.


퇴행성 디스크 판정을 받고 내가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니었다. 배신감과 분노. 노력하면 성공한다며!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병에 걸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초중고 12년을 줄곧 모범생으로 살았던 나는, 상을 받아야 할 순간에 벌을 받는 아이러니를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만약 아픈 허리를 붙들고 들어간 시험장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체험 끝에 그 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이것은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나빴던 어느 여학생의 이야기'로 남고, 나는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것으로 해피엔딩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다음 나를 절망에 빠트린 것은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삶의 방식은 '열심히 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한다'는 것이었으나, 허리가 망가진 다음 나는 아주 제한적인 상황, 즉 내 몸 상태가 허락할 때에만 노력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해보려고 달려들다가도 몸이 아프면 멈추고, 겨우 추스르고 새로 시작하려고 해도 아프면 다시 주저앉았다. 그렇게 나는 삶의 방식을 잃었다.


더욱 슬펐던 것은 내 정체성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입사 초기 나의 상사 중 한 명은 '나의 과거 직원들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았다. 신입일 때에는 그러면서 일을 배우는 거야.'라고 말하며 은근히 야근과 주말출근을 종용했으나, 그것은 내 몸 상태로는 무리였다. 나는 매일 정시에 퇴근해서 저녁 내내 앓아누워 있다가 금요일 퇴근길에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가서 주말 동안 쉬엄쉬엄 보충했다. 사정을 모르는 상사는 나를 '아무리 야근하라고 말해도 못 들은 체하는 게으른 직원'으로 취급했고, 나는 서러웠다.


상사에게 부당한 야근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내 정체성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몸이 멀쩡한 나였다면 상사가 시키기도 전에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증명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인생은 이제 끝났다. 그 사실이 못내 슬펐다(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기의 나는, 남은 인생이 너무 길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노력해서 성취한다'는 삶의 방식과 정체성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의 삶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처음에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순전히 나의 노력으로만 지탱되는 것처럼 보였던 삶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호의와 연속된 우연, 필요할 때마다 베풀어지는 기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허리가 아파서 연수원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지만 나를 위해 강의를 녹음해 주는 동기들, 시험공부 방법을 알려주는 선배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회 사람들이 있었다. 시험 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고, 일터에서는 아플 때마다 적절한 도움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을, 타인을 의지해서 사는 법을 배웠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과거의 수단과 정체성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이 둘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평온을 위한 기도> 중


인생은 노력이라는 인풋을 넣으면 성적이라는 아웃풋이 나오는 시험 같은 것이 아니다. 불행한 결혼생활, 아픈 아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부모형제... 이런 것들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삶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좀 더 열심히 노력했더라면 달라졌을까? 글쎄. 대세에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왜 당신이면 안 되는가?


딕 브라운의 카툰. 바이든 미 대통령이 1972년 상원의원이 되자마자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었을 때, 아버지가 위 카툰을 액자에 넣어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오히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것에 가깝다.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대답하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나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믿는다. 위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배우고 나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의 수단으로 노력은 가장 좋은 선택지이다. 때로는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불확실한 성공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나를 갈아 넣는 종류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생이 내게 준 질문에 답하는 태도로서의 노력,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보여주는 의미로서의 노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과가 따라오던 아니던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이룬 것이 될 테니까.



ps. 사실 나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는 방법을 한 가지 알고 있다. 그것은 기도이다.


당신이 어쩌지 못하는 일로 고통받고 있을 때, 상황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할 때에는 비록 신앙이 없더라도 기도해 보라.


시험 일주일 전, 남들은 모두 마지막 공부에 열을 올릴 때 허리가 무너져 꼼짝할 수 없어 초라한 자취방에 누워 눈물만 흘리던 나를, 무신론자임에도 저절로 '하나님, 제발 시험만 보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나를 찾아오시고, 기적처럼 일으켜 시험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당신도 만나주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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