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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하나님 나라

by 밍이

소망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비교적 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 아직 공부머리가 깨지 않았을 때부터 과중한 학업을 강요한다. 이것은 일종의 학대이다. 그 과정에서 귀한 주의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파괴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학업을 강요하면 신앙과 인성을 교육할 기회가 없어진다. 아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국을 가장 효과적으로 흔드는 사단의 전략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베데스다 연못 앞 병자(요한복음 5장)처럼, 나는 남들을 제치고 연못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애쓰는 대신 예수님을 선택하겠다. 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한국 입시에서 성공해 보이겠다.


그래서 나는 소망이를 다르게 키우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이 학원을 돌며 진도를 뺄 때 소망이는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자연에서 실컷 뛰어놀았다. 다른 애들이 초등 필독서를 읽을 때 소망이는 이야기 성경을 읽었고, 다른 애들이 학원 숙제를 할 때 소망이는 성경을 필사했다. 그러면서 굳게 믿었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녀를 교육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거라고.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도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망이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하긴 했으나 또래 친구들에 비해 공부 격차는 현저히 벌어졌고, 이렇게 열심히 신앙교육을 시켰는데도 신앙 역시 불분명해 보였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기도하던 내게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다.


- 너는 그릇된 번영신학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입시에 성공하겠다'는 포부 역시 결국 네 자식이 세상적으로 잘 되게 해 달라는 것 아니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은 대학에 못 갈 수 있고, 좋은 직업을 못 가질 수 있다. 자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원하는 것을 성취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 너는 하나님의 옳음이 아니라 너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너는 네 자식이 세상적으로 잘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택한 너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다른 이들은 틀렸고 나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소망이의 세상적 성공을 내려놓았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마음 한 편에 묻어버렸다.


힘들게 소망이의 세상적 성공을 포기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을 요구하셨다.

- 네 이웃의 자녀가 네 자녀보다 잘 되기를 기도해라.

너의 원수의 자녀가 네 자녀보다 잘 되기를 기도해라.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주여, 저는 테레사 수녀가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왜 여기서 찾으세요."라고 답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겨우 하나님을 의지해서 원수를 용서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갔는데, 그것도 몇 년이 걸렸는데, 저 미션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난이도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사람의 자녀를 계속 떠오르게 하시면서 저 미션을 상기시켜 주셨기에, 나는 괴로운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명에 명시적으로 불순종한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 역시 순종해 보려고 애를 썼다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진저리를 쳤다가를 반복했다. 결국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포기 선언을 하고, 마치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쳤듯이 연수를 빌미 삼아 미국으로 향했다.


한동안은 미션을 잊고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이에 대한 나의, 아직 다 내려놓지 못한 욕심'을 하나씩 보여주셨고, 그때마다 또 괴로움에 몸부리치다가 나를 꺾고 주의 뜻에 순종하면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방학을 맞아 친구집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친구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매일 깊은 말씀으로 은혜받던 중 마지막 날에 강사님이 '그 새벽기도 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의 자녀들이 모두 큰 믿음 가지고 세상에서 크게 쓰임받기'를 축복하셨다. 강력한 메시지였다.


그럼 그렇지. 아유 놀래라. 난 또 하나님이 내 자식 복 주지 않으시려는 줄 알았네. 역시 이렇게 크게 축복하시려고 나를 단련시키셨구만. 흐뭇한 마음으로 "아멘!!!"하고 크게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이 옆에서 조용히 속삭이셨다. 네 자식 말고. 네 자식이 아니라 네 지체의 자녀들이 크게 쓰임받기를 기도해라.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 자식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인데.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불만이 잔뜩 생겼지만, 이번에 떠오른 얼굴은 다행히 원수의 자식은 아니었다. 교회 지체의 자녀였다.


나는 마지못해 순종하면서, '제가 이 아이를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제 자식을 책임지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했다. 뭐, 당연히 그러실 것이다. 내가 기대한 성공이나 쓰임은 아닐지 몰라도, 하나님이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내심 내가 남의 아이를 축복하면, 남이 나의 아이를 축복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한참 뒤 사고가 발생했다. 소망이가 체육 수업시간에 하키 스틱으로 친구의 눈을 쳐서 다치게 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끝날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사고가 훨씬 컸고, 상처가 깊은 그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는 고통 가운에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어린 아이가 이런 고통을 당하다니.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문병을 가서 만난 그 어머니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가정도 믿음이 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일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느꼈다. 그 뜻을 계속 구하던 중 오랜만에 예전 교회 지체를 만났다. 그는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준 것이었는데, 어쩐지 나에게 기도제목이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나는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 소망이의 친구가 고통당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 중보를 부탁했다. 그리고 다른 얘기로 담소를 나누던 중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A라는 사람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A는 매우 깊고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주께 자기 삶을 헌신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의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어째서 주님께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들도 죄의 자리에 있으면서 계속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적하실 텐데, 왜 저렇게 신실한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예전 교회 지체로부터 A가 자기 자녀를 염두에 두고 '주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에서 크게 쓰임받기를!'이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사심 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자기 자녀가 아니라 다른 지체의 자녀가 크게 쓰임받기를 바라야지요."


이 말을 하고 난 다음에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토록 신실해 보이는 A도 자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구나. 그럼에도 그것을 신앙심으로 포장하고 있구나. 이것이 A의 문제구나.


그러고 나니 의문이 떠올랐다. 주여, 남의 자식을 축복하면 했지, 왜 꼭 내 자식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야 합니까. 비교는 안 좋은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답하셨다.

- 교만은 본질상 경쟁적인 속성이 있다. 너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너보다 훨씬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그보다는 조금 나아지도록 도왔을 뿐이다. 너를 뛰어넘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돕지 않았다. 그것은 네가 가장 크게 되고자 하는 교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이웃의 자녀를 두고 "주여, OO가 잘 되도록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는 대체로 "주여, OO가 잘 되도록 축복해 주세요. (그러나 제 자식이 그보다는 조금 더 잘 되게 해 주세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나는 교만을 매우 싫어한다. 나는 교회 지체들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서 서로 축복함으로써 연합을 이루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교만을 꺾고자, 너의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잘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서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너희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다.


갑자기 지금 사고로 고통당하고 있는 소망이의 친구 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북받쳤다. 그 아이의 고통을 기억하면 나는 도저히 그 아이보다 소망이가 더 잘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내 자식이 제일 잘 되었으면 하는, 그 당연하면서 죄된 생각을 나는 꺾어버리겠다.


나는 "OO가 소망이보다 잘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를 한 순간 불쑥 두려움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의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내 아이를 망치려는 사단의 속임수가 아닐까?


하지만 성경에 비추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아니다. 나는 당연히 내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내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내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했듯이, 누군가 내 아이를 축복할 것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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