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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Feb 08. 2021

전쟁 같았던 그때

내 인생의 세 번째 성취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심부름에서 돌아온 동생이 거스름돈 1,000원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엄마가 "아이고, 일부러 싸게 파는 슈퍼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그걸 잃어버리니!"하고 화를 내셨다. 부주의함에 대한 훈육이 아니라 잃어버린 돈에 대한 아쉬움과 화였다. '엄마가 언제부터 이렇게 1,000원에 벌벌 떠는 사람이 되었지?'하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최근 들어 엄마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한숨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나는 우리집이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안 있어 우리는 허름한 동네로 쫓기듯이 이사를 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낡은 집에서는 이전에 보지 못한 벌레들이 나왔다. 욕실에서 처음으로 노래기를 발견한 날, 나는 고1이었는데도 마치 초등학생처럼 엉엉 울었다. 엄마 아빠는 그깟 벌레가 뭐가 무섭냐면서 나를 달래주었지만 나는 벌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년은 내내 힘들었다. 나는 중3때 이미 학업 스트레스로 심신이 망가진 상태였고, 거기다 이제는 가난이라는 짐까지 짊어져야 되었다. 한참 사춘기였던 나는 가난이 부끄러웠으나,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내가 더 부끄러워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척했다. 언제나 나 자신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단지 불편할 뿐이야!'라고 소리치며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나는 이 시기의 밍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위로받고 돌봄 받아야 할 때에 나를 다그치고 몰아붙이기만 했다.).


언젠가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이마가 부어서 왔다. 아이들이 이유를 묻자 그 애는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다'라고 답했고, 그것을 계기로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침대에서 떨어진 경험을 말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어색한 목소리로 "침대에서 떨어지면 되게 아파."라고 말했으나, 나에게는 침대가 없었다. 밤마다 유행 지난 밍크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침대가 없는데도 있는 척 말한 것이 너무 수치스러웠고, 나 자신에게 '너 왜 거짓말했어!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잖아!'라고 다그쳤다. 결국 내 용돈을 모으고 엄마의 보조를 받아 싸구려 침대를 사고 나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엄마의 보조를 받아 뭔가를 산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부모님 얼굴을 보면 차마 돈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아껴서 문제집을 사고 학급비를 냈다. 3만 원짜리 교복 바지 살 돈이 없어서, 산자락 초입에 있어서 더럽게 추운 그 학교를 3년 내내 스커트 차림으로 다녔다.


photo by anh-nguyen on  unsplash


그러다 내가 고3 때 수능 보기 두 달 전에 우리집이 완전히 망하자, 나는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다 썩어가는 이 집에서 영원히 탈출하지 못해!'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난 이튿날 나는 바로 과외 알바를 구했고, 그때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과외 알바로 벌어 썼다.


과외 알바는 시간당 페이가 좋았지만 나는 더욱더 고소득을 원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매일 왕복 4시간을 통학하면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그 와중에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해서 과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어서 사회과학 소모임에도 든 참이었다.


나는 맨날 '바쁘다 바빠!' 하면서 과제를 하고, 술자리에서는 술도 못 마시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술을 권하고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논 뒤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전에 홀연히 술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다음 날이면 중앙도서관 담벼락에 '교내 성희롱 근절'에 관한 대자보를 붙이는 식으로 살았다. 다행히 장학금이 많은 과여서 등록금은 대충 해결되었지만, 나는 생활비 말고도 장래를 위해 유학자금을 모으고 싶었고, 부모님이 내게 손을 벌릴 때마다 틈틈이 집에다 급전을 마련해주어야 했다.


나는 고액과외 알바를 하는 선배에게 노하우를 물었고, '전과목 매니지먼트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거다!' 싶었다. 가르치는 일과 계획 짜는 일은 자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스스로 학업계획을 세울 역량이 없는 성적 하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평소에는 영, 수를 가르치고, 시험 때에는 전과목 컨설팅을 하는 고액과외를 했다. 돈을 많이 받은 만큼 성적을 확실하게 올려야 하기에, 나는 과외 알바를 한 7년 동안 방학 때 어딘가로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중고등학생 성적을 올리는 데에는 방학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융통성 있게 해도 될 걸 그랬나 싶다. 20대에 놀아본 기억이 없어서 너무 아쉽다).


아무튼 나의 수능이 끝난 후에도 7년 동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시험을 함께 하면서 수험생처럼 지냈고, 그 덕택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돈을 벌어서 대학교와 대학원을 내 힘으로 무사히 마쳤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의 20대는 전쟁 같았다. 그럼에도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다. '나의 미래는 좋아질 거야. 나는 원하는 걸 이룰 거야.'라는 신념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 '내 인생의 성취와 나의 강점'이라는 주제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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