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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12. 2021

패닉 바잉(panic buying) 집 구매기(1)


"시중에 역대 최대 규모의 토지보상금이 풀린다던데. 집값 오르면 어쩌지?"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입에 물고 스마트폰을 보던 남편이 말했다. 슬쩍 쳐다보니 얼굴빛이 어두웠다. 그는 애써 웃으며 "그래도 전세보증금 낼 돈은 충분하니까 괜찮겠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괜찮지 않았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그녀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피부로 다가왔다.




그녀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성실히 가게를 꾸려 모은 돈으로 땅을 샀다. 90년대에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만큼 낙후되었지만, 곧 있으면 개발된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다.


토지등기부에 당신 이름 석 자를 올린 날, 소주 한 병에 거나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는 그녀와 동생을 앉혀놓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도 조금만 더 참으면 부자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딱히 고생이랄 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부자 된다는 말에는 그녀도 마음이 설레었다. 구립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있던 고급 주택단지의 양옥집들이 떠올랐다. 이런 집에서는 누가 사나 궁금했는데. 나도 이제 붉은 벽돌집 이층 한 구석에 내 방을 가지고, 창문에는 하얀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다.


곧 있으면 개발된다던 그 땅은 그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갈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기업의 체인점이었던 아버지의 가게가 갑의 물량공세와 불공정행위에 허덕이다가 지리멸렬한 법정공방으로 들어가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사춘기 여학생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빵을 사 먹을 때에도, 야간 자율학습 전에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주문할 때에도, 그녀는 주머니 속의 돈을 백 원 단위까지 헤아리면서 친구들이 그녀의 가난을 눈치챌까봐 초조했다.


그녀는 이 모든 괴로움이 어쩐지 '분수에 넘치는 것을 욕심냈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착실히 일해서 번 돈을 저축하는 신성한 근로의 삶이 아니라, 부동산이라는 불로소득으로 일거에 부자가 되려다가 벌을 받은 것이라고.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불로소득은 나쁜 거라고 배우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부동산은, 재테크는 그녀에게 금기가 되었다.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볼드모트와 같은 존재.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던 해부터 지방생활을 하다가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소위 '숲세권'으로 불리는 곳에 전셋집을 구했다. 산 좋고, 물 좋고, 학원 없는 곳에서 아이를 마음껏 뛰어놀게 하면서 행복한 정서를 갖게 해 주고 싶었기도 하지만, 내심으로는 '이 정도가 내 분수에 맞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으리으리한 학군지, 역세권 아파트는 어쩐지 무리일 것 같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내지 마. 마음속에서 계속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행복했다. 육아휴직 중이었던 그녀는 유치원 하원 후 매일같이 산으로, 개천으로, 텃밭으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놀았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흙을 밟을 때면, 그녀가 마치 헬렌 니어링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좋은 걸 다른 엄마들은 왜 안 하는 거지? 다들 애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열 올리지 말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면 좋으련만.


그 생각은 유치원 첫 방학을 맞이하여 산산이 부서졌다. 국공립 유치원은 여름방학이 5주나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말은 아침 9시에 일어나서 밤 11시나 되어야 자는 혈기왕성한 남자아이의 14시간을 온전히 엄마인 그녀가 채워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5주 동안이나.


자연 속에서 뛰노는 것은 길게 잡아봐야 하루 세 시간이면 충분했고, 그마저도 한참 더운 여름날에는 오 분만 걸어도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기에 나갈 수도 없었다.


집에서 온 몸을 다해 놀아주는 것도 한두 시간이면 기진맥진했다. 육아전문가들은 아이를 심심하게 두어야 창의성이 개발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데, 가만히 두면 유튜브나 틀어달라고 조르는 건 우리 아이만 그런 걸까. 온종일 남아도는 시간에 아이를 스마트폰에서 떼어 놓으려면 종목이 뭐든 가리지 않고 어떤 학원이라도 보내야 했다.


아이를 보낼 곳을 알아보다가 그녀는 '숲세권'의 숨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방 둘러봐도 숲밖에 없다는 것. 역이 있었으면 역세권이었을 것이고, 편의시설이 많았으면 번화가라 불렸겠지.


아파트만 덩그러니 지어지고 아직 인프라가 형성되지 않은 동네에는 학원은커녕 그 흔한 키즈카페 하나 없었다. 근처 동네 그 어떤 학원에 전화를 해 봐도 '거기까지는 셔틀이 가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학원은 포기하고 식사 준비에 쓰는 노력이나 아껴볼까 싶어 배달어플을 켜면 '배달 불가 지역'이라는 메시지가 뜨기 일쑤였다.


온종일 애랑 엉켜서 삼시 세 끼를 해 먹는 방학을 보낸 후 그녀는 무조건 전세기간 만료 후에는 학원이 밀집한 학군지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나만 그걸 몰랐네. 그동안 학군지 입성에 목을 매는 엄마들을 은근히 우습게 여긴 것도 머리 숙여 반성했다.


그나마 육아휴직 중인 지금이야 내 몸 하나 힘든 것을 참으면 그만이지만, 복직한 후에는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았다. 집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학원가에서 하루에 두세 개 정도는 뺑뺑이를 돌려야 공백 없이 아이를 돌볼 수가 있었다. 마침 그 무렵이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이기도 했다. 이참에 한 군데 집을 사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집을 사는 것은 두려웠다. 시골 출신인 그녀는 고작 그녀가 다닌 대학교 주변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동네 외에는 서울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연일 신문지상에 어느 동네 무슨 아파트에 대한 기사들이 넘쳐났지만, 부동산과 담쌓고 지내던 그녀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다만 대치동이 학군지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학군지로 갈 거면 대치동 입성 한 번 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남편과 함께 소위 '임장'이란 걸 가 보았다가, 노후된 아파트에 걸맞지 않은 가격에 깜짝 놀라 뒤돌아왔다. 설령 내 자식이 여기서 서울대에 간다 해도 그때까지 버티고 살 자신이 없었다.


다른 부모들이 새삼 대단해보였다. '나는 그 정도의 모성애가 없는 건가' 싶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가, '아직까지 그닥 공부에 흥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 아이를 무리해서 대치동에 집어넣으면 적응하기만 어려울 거야'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딱히 가고 싶은 지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고민만 하면서 남은 전세기간을 보내던 중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보고 비싸다고 생각했던 가격은 이제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금액이 되었다.


오래 전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가 분양하던 때에 남편이 반 농담조로 "20평대가 9억 원이래. 5천만 원 피 주면 살 수 있다는데 어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무슨 20평대가 9억 원씩이나 하나며, 거기에 피는 무슨 말이냐며(분양권에 프리미엄을 붙여 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던 때였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는데. 이제 9억 원은커녕 그 두 배를 주고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시중에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은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84제곱미터'라는 농담이 유행했다. 그 참에 남편이 말한 것이었다. 시중에 역대 최대 규모의 토지보상금이 풀린다고.


photo by katie-manning on unsplash


처음에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불안했지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아파트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그녀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전세 옮겨 다니면 되지. 설마 우리 가족 살 집 하나 없겠어.


그런데 밤이 되도록 남편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집값 오르면 전셋값은 안 오르겠어.


다음 날 새벽,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생전 들여다보지 않던 네이버 부동산에 접속했다. 볼드모트와 같은 두려움은 이만 버리자. 이제는 행동을 해야 할 때야. 내 새끼 학교 보내야지.  


먼저 가진 돈과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계산해서 마지노선을 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회사, 남편의 직장에서 출퇴근 가능한 거리에 있는 학군지 몇 군데를 추려서 금액 상한선에 맞는 아파트 목록을 엑셀로 정리했다. 모두 워킹맘인 그녀가 남의 손을 최대한 빌리지 않고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 있는 곳들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열 몇 군데의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적당한 매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허무하게도 네이버에서 본 최저가의 매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들 네이버 최저가보다 일, 이억 원은 더 높게 불렀다. 그마저도 며칠 뒤 다시 물어보면 오천만 원씩 더 올라 있었다.


어쩌다 적당한(결코 마음에 쏙 드는 게 아니라, 너무 무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수준의) 매물을 발견하고 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면,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주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겨우 달려가서 보면 마뜩잖은 물건이 태반이었다.


한 번은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길래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괜찮네요."라고 말했다. 중개인이 번개같이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주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일억오천만 원을 올려 불렀고, 그녀는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불같은 상승장이었다. 매도인 우위 시장이라는 개념도 처음 알았다.




그러던 중 매물이 하나 나왔다. 중개인은 그녀에게 이 물건이 이전에 본 것보다 더 좋다며 열심히 권했다. 그녀가 듣기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집을 언제 볼 수 있는지 물으니 중개인은 조심스럽게, 지금 대기 매수자가 3명이 붙어있다고, 그런데 임차인이 집을 안 보여주려고 버티고 있다고, 임차인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집주인도 임차인에게 강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서 집을 안 보고 사는 조건이면 바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집을 안 보고 산다라... 십 억원이 넘는 물건을? 전 재산을 다 털고도 빚까지 져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 그만 결정하고 싶었다. 네이버 부동산 사이트에 나와 있는 도면을 살펴보고, 지도로 인근 지역도 검색해 봤다. 그녀 회사 근처라 익숙한 동네이기도 했다. 그래, 여기로 하자.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아파트를 겠다고. 남편은 가격을 듣고는 너무 비싸다며, 천만 원이라도 깎아보라고 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 매도인 우위 시장이라고. 매수인 세 명이 붙어 있다고.


남편은 다시 네이버 부동산 매물을 보면서, 그거보다 싼 집이 나와 있다고 말했다. 그거 다 미끼인 거 몰라? 내가 한두 번 속은 줄 알아? 최근 며칠 동안 그녀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지도와 매물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아는 남편이 끝내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녀는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살 테니 가계약금을 보낼 계좌를 달라고 말했다. 중개인이 계좌를 불러주자 그녀는 '지금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두 시간 뒤에 입금이 가능하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바로 택시를 탔다.


사려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린 뒤 그녀는 동 주위를 둘러보고 층수도 확인해 보았다. 집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밖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아이가 다니게 될 학교와의 거리도 계산해 보고, 인근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바로 매도인의 계좌번호로 삼천만 원의 가계약금을 부쳤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내가 집도 안 보고 사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아니면 궁지에 몰린 쥐처럼 패닉 바잉(panic buying)을 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과 토지보상금 얘기를 나눈 날로부터 꼭 일주일만이었다.



패닉 바잉(panic buying) 집 구매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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