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_쿠스코
고산병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본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본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은 힘겹게 내딛는 두발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현 위치 대략 해발 4800미터. 비니쿤카 가는 길. 일명 무지개산. 이번 트래킹을 위해 새벽 3시에 시작된 여정은 go or stop 결정의 기로에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미치도록 머리가 아팠다. 경험해보지 못한 두통은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 두 다리를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해발 3300미터의 쿠스코에서도 없었던 고산병은 고작 몇 시간 만에 1000미터를 넘게 점프한 죄를 묻고 있었다.
05:00 AM
춥다. 나름대로 대비한다며 옷을 여러 벌 껴입었지만 못 견디게 춥다. 좁은 공간에서 움직일 여유도 없다. 정녕 이 버스에는 히터도 없는 것인가.
3시에 일어나 바삐 준비하고 3시 30분에 픽업, 일행들을 기다렸다 4시쯤 쿠스코를 출발했다. 3시간 정도 걸려 해발 4300미터 정도 되는 곳까지 이동한다고 했다. 편할 거라 생각했던 이 일정에는 예상치 못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졸릴 거라며 잠을 청해 보지만 추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07:00 AM
언제 지나갈까 싶었던 3시간을 겨우 보내고 아침을 먹을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기다려야 했다. 추위는 차 안이나 밖이나 비슷했다. 30분을 기다려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컨이 곁들여진 간단한 식사를 하고 버스로 잠깐 이동 후 비니쿤카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12:00 AM
길은 어렵지 않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을 뿐 대부분 평이했고 단단하게 박힌 흙과 간간이 자란 잡초들은 이 트래킹 코스가 어렵지 않은 코스임을 말해줬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다. 1분 걷고 1분 쉬기를 반복하고 있다. 다리도 아프고, 숨도 가쁘고, 머리가 매우 아프다. 갈까, 포기할까 마음속의 저울이 수십 번 이쪽저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가보고는 싶어 주변에 비어 있는 말을 잡아 탔다. 처음부터 탔다면 더 편했겠지만 괜한 자존심에 타지 않았는데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말안장에 앉은 나의 몸은 점점 비니쿤카를 향해 가고 있고 두통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간다.
01:00 PM
얼마 가지 않은 것 같은데 내려야 했다. 말은 더 이상 가지 못한다. 눈앞에 비니쿤카 정상이 보이긴 한다. 다시 1분 걷고 1분 쉬기를 반복한다. 그나마 목표 지점에 눈에 보인다는 것이 마지막 힘을 내게 했다. 거의 기다시피 한 결과 비니쿤카 정상에 올랐다. 힘든 과정을 겪은 후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는 환희에 휩싸여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내 몸을 지탱하기 힘든 두 다리와 시각마저 장악하는 것 같은 두통과 산 정상의 강한 바람에 의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채 5분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다시 가야만 했다. 내려가는 길에는 말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로 내려가야 했다.
04:00 PM
결국 내려오긴 했다. 꼴찌로. 내려오긴 했는데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중력이 이끄는 대로 기어가듯 굴러가듯 내려온 것 같다.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던 곳에는 이제 점심이 차려져 있다. 그러나 먹을 수가 없다. 차에 들어가 머리를 싸맨 채 기대어 있으니 가이드가 와 고산병에 특효라며 알코올 향이 나는 무언가를 머리에 발라준다. 효과 없다. 거의 반죽음 상태로 쿠스코로 돌아왔다. 저녁까지 건너뛴 건 당연했으며 다음날도 쉬이 거동하질 못했다.
아쉬움 또는 교훈
숙소에 붙어 있던 사진에 이끌려 섣불리 도전했던 5200미터는 이번 여행 중 가장 힘든 순간을 나에게 선물해 줬다. 그리고 이 일은 남은 여행에 그 어떤 트래킹에도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가지 않으면 남미여행의 의미가 없을 정도라 말하던 토레스 델 파이네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으나 한편으론 다행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