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_아만따니 섬
쿠바에서 만난 그녀는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다고 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의 휘황찬란한 광명보다는 해가 지는 순간의 고즈넉한 쓸쓸함이 좋다고 했다. 사위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있는 순간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고, 그녀만을 위한 거대한 미술관이 펼쳐진 듯하다고 했다. 결국엔 일몰과 함께 하는 노을이 있어 좋다고 했다.
아만따니 섬. 있는 줄도 모르게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이곳에 온 것은 노을을 보기 위해서다. 언제인지 아만따니 섬이 티티카카의 노을을 보기에 제격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을이라는 얘기에 쿠바의 그녀가 생각났었다. 아만따니 섬은 내게 들러야만 할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되새긴 덕분에 지금의 나는 노을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또한 어둠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은 선착장에 가까운 섬의 동쪽에 있기에 노을을 보기 위해서 섬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 수면에 비하면 높은 정상은 아니지만 이미 해발 3800미터의 고지대에서는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 빼어나다는 경관을 보기 위해 힘을 들여 높은 곳에 올라가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걱정이 됐다. 그럼에도 좋은 나쁘든 직접 봐야 하기에 이를 악물고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시원하다. 막힌 곳이 없이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있고 눈앞에는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 나만이라도 티티카카 해(海)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본 뒤 서서히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각자의 자리를 잡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작은 집들이 있다. 마치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우리의 농촌 같은 모습이었다. 언젠가 내가 살았었고,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그런 마을이다.
하루 내내 서로를 바라보던 해와 바다가 만나려고 한다. 하늘은 부끄러움을 색깔로 나타내려 한다. 나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려 한다. 적당한 구름이 하늘을 어루만지며 붉은빛을 품어낸다.
이건가? 수백 번 봐왔던 노을이지만 지금의 노을은 다르게 느껴진다. 남미의 페루, 티티카카 호수의 노을이기에 특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노을에 대한 감상이 다르다. 오늘 하루 뜨겁게 작열하던 태양이 쉬러 들어가는 시간,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피어오르는 불꽃, 하루를 열심히 보낸 시간만이 맞이할 수 있는 잔잔한 되새김,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렇게 열정과 냉정, 뜨거움과 차가움, 영광과 슬픔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이제껏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바람에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붉은빛이 검게 변할 때까지 나는 멍하니 섬의 정상에 서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을 조심히 내려오며 노을에 대한 흥분된 감정을 정리했다. 그녀가 노을을 보며 느꼈던 감정도 나와 비슷했을까. 아마 조금은 겹치는 부분이 있겠지. 있지 않더라도 노을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