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이곳에 한국인이 왔다
까사에 가끔 놀러 오던 한국인이자 쿠바인. 그러니까 쿠바 여자와 결혼해 쿠바에 정착하게 된 남자로부터 한국의 집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알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만 얘기가 나온 김에 한번 들러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라며 추천해줬다.
더위 속에 술과 음악과 시가 연기와 함께 지내던 나는 같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과 그곳에 들러보기로 했다. 쿠바, 이 먼 나라에는 어떻게 한국인들이 오게 되었을까. 평소에는 있지도 않았을 궁금증이 생겨났다.
한국의 집 (정확히는 한국 쿠바 문화 클럽)은 베다도 지역의 한 주택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특색이 없고, 규모 또한 크지 않으며 어디 있는지 몰라 바로 코 앞에 두고도 여러 번을 묻고 헤멜 정도로 존재감 없이 조용히, 그냥 그곳에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게 맞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맞게 찾아온 것임을 확인시켜주듯 태극기와 서울의 사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문 너머에서 한국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끌리듯 소리가 나는 곳에 다다르자 3명의 소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약간은 어설프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으로 그들은 K-pop을 불렀다. 한국인 후손일까, 쿠바인일까, 이름을 물어보고 몇 마디 해보려는 찰나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그분은 괜찮다면 이 장소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마다할 리가 없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선풍기로 겨우 더위를 달래던 할아버지는 땀을 흘리면서 쿠바의 한국인에 대해서 소개를 시작했다.
1900년대 초, 1000여 명의 한국인이 멕시코로 돈을 벌러 왔다. 일을 하다 보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돌아가지도 못한 채 멕시코 전역을 전전하다 1920년대 쿠바로 300여 명이 넘어왔다. 설탕 붐이 일었던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은 훨씬 좋은 조건으로 한국인을 유혹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 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낙후된 일자리에서 겨우 삶을 연명해 나갔다. 이후 쿠바가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이들과 한국의 교류는 완전히 끊겨버리고 말았다. 쿠바 내에서도 뿔뿔이 흩어졌던 한국인들은 2세, 3세가 되어서야 서로 모이며 커뮤니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쿠바와 한국의 외교가 회복되면서 한국어를 쓸 수 있는 몇몇 2세들은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미 쿠바 1세대들은 모두 숨을 거둔 뒤였다. 이후 이 곳은 한국을 잊지 않으려는 후손들과 한류 바람으로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하는 쿠바인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현재 한국의 모습을 소개하고, 한글을 가르치며 쿠바 내 한인 커뮤니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인 3세라 본인을 소개한 할아버지는 몇 달 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갈 것이라며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리고 이 먼 땅, 쿠바에서 한국인의 향기를 찾아온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준 할아버지에게 같이 간 동료들이 선물을 하나씩 건넸다. 언제 준비했는지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하나씩 건네는데 할아버지가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팁을 주기에도 애매한 상황 속에 나는 준비한 선물이 없어 난처한 미소만을 날리고 말았다. 대신 방명록에 그들의 행복과 건강을 무한한 마음으로 빌어주는 글을 적었다.
계속되는 작별 인사 속에 한참 만에 한국의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낯선 나라에 정착해버린 사람들. 어떤 마음으로 그 순간들을 살아남았을까. 자발적으로 찾아온,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지나쳐버릴 나에겐 그 무거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무작정 신나고 방방 떴던 쿠바 여행의 마지막이 왠지 차분하고 엄숙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다시 방방 떴던 것은 비밀)
쿠바 여행을 하는 동안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이곳을 한번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낯선 곳에서 피어난 한국의 꽃, 그 꽃이 어떤 어려움 속에 피어났는지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인다면 한층 다른 쿠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