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키토
에콰도르는 나라 이름 자체가 적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quador : 적도 ; 포르투갈어, equator : 적도 ; 영어) 그 뜻에 부합하게끔 에콰도르에는 적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듯 적도박물관이 있고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나 역시 그 많은 여행자들 중 하나로, 적도라는 이름의 나라에 온 이상 적도박물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키토 중심에서 외곽으로 한 시간 여 정도 떨어진 적도박물관, 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예상치 못한 황량함에 당황했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지도와 길묻기에 의지해 길을 찾아갔다. 이곳에 적도 박물관은 두 개라 했다. 예전부터 있던 하나와 새로 만든 그것. 최근의 것은 적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기에 이전의 적도박물관을 향하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외면해야만 했다.
긴가민가 하며 찾아간 적도박물관(Museo de Sitio Intiñan)은 특별히 티켓오피스도 없었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보니 스탶인 듯한 사람이 나왔고 그들 통해 가이드를 받았다. 이후에 그에게 가이드요금을 줬을 뿐이다.
요약하면 이곳은 전시와 텍스트 위주의 박물관이 아니라 체험위주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거짓말 적도체험의 모습을 지금부터 공개하고자 한다.
1. 계란 세우기
콜럼버스가 되어 계란을 세워보자. 단 그처럼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말이다. 이 일화 덕분에 깨지 않고 계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겨지지만 사실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시도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적도 위라서 계란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사람들은 평생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계란 세우기에 도전하게 되고 불가능한 줄 알았던 계란 세우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성공에 도취되어 적도의 특수성에 감탄하게 되고 이어지는 체험에서도 쉽게 가이드의 말을 믿고 만다.
2. 세면대의 회오리
가이드를 따라 가면 빨간 선(적도선이라고 그려놓은) 위에 있는 세면대를 보여준다. 그곳의 물을 빼면 특별한 회전 없이 물이 빠진다. 똑같은 세면대를 적도선 기준 남쪽으로 가 똑같은 실험을 하면 물이 시계방향으로 돌고 북쪽으로 가서 하면 반시계방향으로 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달라지는 물의 방향에 환호하지만 처음부터 의심하던 나는 그 미묘한 트릭을 눈치 채고 말았다. 원하는 물의 회전 방향으로 미세하게 치우쳐 물을 붓는 것이 그것이다.
이 체험과 관련된 이론으로 코리올리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정도 사이즈의 실험에서는 코리올리 효과에 따른 힘의 크기가 너무나도 작아서 세면대의 모양, 또는 기스, 그리고 바람에 의한 물의 움직임을 거스를 수 없다. 더구나 고요한 물도 아닌 의도된 방향으로 붓고 있는 물이라면 더 설명할 여지도 없다.
3. 눈 감고 걷기.
빨간 선을 따라 눈을 감고 걸어보아라. 남쪽으로 작용하는 힘, 북쪽으로 작용하는 힘이 서로 엇갈려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사람들은 걸으며 휘청댄다. 나는 그냥 잘 걸어갔더니 눈을 뜬 거 아니냐고, 아크로바틱을 했냐고 물어본다.
원래 눈을 감으면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그런데 유독 그 선 위에서 사람들이 중심잡기가 어려운 것은 중심잡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오링테스트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아라. 다른 장소에서는 이 동그라미를 떨어뜨리기가 어렵지만, 적도 위에서는 쉽게 떨어뜨릴 수 있다. 적도는 자전에 의한 원심력이 가장 큰 곳으로 중력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힘도 약해집니다.
이 실험은 보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왜 피실험자만 힘이 약해지는데? 같이 선 위에 올라간 가이드는 힘이 그대로인데?
5. 모든 실험을 통틀어
문제는 빨갛게 그어놓은 선이 진짜 적도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정확하다는 GPS마저도 1m의 오차는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설사 이 빨간 선을 그리는 순간에는 정확히 적도였다 하더라도 불행히 지구의 자전축은 움직인다. 이로 인해 우리가 정해놓은 위도는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천문학적 의미의 적도는 같이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정확하지도 않은 선을 기준으로 고작 몇 미터 움직인다고 그 힘이 반대로 적용된다니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함께 한 여행자들에겐 바로 얘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적도 체험을 하고 신기해하며, 한껏 고무됐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굳이 얘기해서 그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에콰도르에 가기 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진 않은가 보다. 나중에 키토를 떠나고 나서야 하나둘 얘기를 풀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거였다. 증명이라도 하듯 계란 세우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계란 형’이라는 별명만 얻었다. 그들의 여행에서 옳고 그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 순간에 즐길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하나하나 분석해가면서 일부러 즐거움을 깨뜨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분석 때문에 나만 그곳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독 적도박물관에서 시비를 가리고 싶었던 것은 한때 꿈꾸다 이내 포기해버린 물리학자의 꿈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