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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대 Oct 13. 2020

짧은 가방끈, 행복이 되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건 반드시 그 일을 해야 될 때가 있다. 그런데도 나처럼 배워야 할 때를 놓치고 나면 그걸 뒤늦게 시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 못한 이유가 집이 가난해서, 부모의 교육열이나 자신의 의욕이 모자라서, 청소년기에 길을 잘못 드는 등 다양할 것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였다면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다. 못 배운 그것  때문에 힘들 수 있다. 주눅이 들거나 수치스러울 때가 있고 좌절감이 들 때도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작은 위로나 힘이 되고 용기를 얻는데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겠다.   


나는 제때 공부 못한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뒤늦게라도 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먹고사는데 치중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 나는 1950년 전라도 어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를 못한 채 열일곱 살 때부터 직장에서 일했다.


인쇄소에서 10여 년, 대기업체에서 20여 년, 건설업체에서 8년을 일했다. 지금은 10년째 공동주택관리를 하고 있다.   인쇄소에서는 오프셋 인쇄에 이어 활판인쇄를 했다. 창간(創刊)을 앞둔 어느 주간신문사 공무국에서 주조(鑄造), 정판(整版), 식자(植字ㆍ조판) 작업을 했다. 신설업체다 보니 책이 다 만들어진 뒤 제본(製本)과 재단(裁斷)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공정의 일을 해야만 했다. 조판을 하는 동안 수많은 작가,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김동리, 신석정, 서정주, 박목월, 문덕수, 백철 그리고 장영창, 유광렬 등 많은 문인들의 육필원고와 책을 대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일했던 경험이 사회생활에 큰 자산이 됐다고 생각된다. 제조업체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은 현장 공작기계조작에서부터 기획조정실, 부속실 그리고 만 10년간 인사부에서 일한 바 있다. 내 사업으로 빵 장사와 학원을 운영해 보기도 했다. 건설 업체에서도 일했다. 중견 전문건설업체에서 8년 4개월간 일하는 동안 현장 조공(助工)을 시작으로 전국 현장을 누비며 사장을 대신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총괄관리를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벼라 별일을 다 해보았다. 요즘 오십 대 중반이면 정년을 맞게 되지만 나는 일흔이 넘은 지금도 일하고 있다.   직장과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직장과는 상관없는 여러 가지 일을 수십 년 동안 맡아 왔으며, 지금도 전국 규모의 큰 모임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일들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일임은 물론, 오히려 돈을 써야 된다. 나는 남들처럼 제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가방끈이 짧아서 가능했다. 많이 배웠더라면 하지도 않을 일들이다.  


어느 품격 있는(?) 모임에서 출신학교에 관해 각자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다. 누군가 전공이 무엇이냐고 묻고 나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학교까지 물어본다. 머뭇거리다가 나는 가방끈이 짧다고 대답하자, 질문했던 그가 오히려 멋쩍어하는 듯했다. 전에는 학벌에 대해 누가 묻지도 않았으니 감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드러낸 적도 없었다. 나 자신이 거짓스레 사는 것처럼 생각돼 늘 찜찜했다. 지금은 전과 달리 일부러 드러낸다. 내 나이쯤이면 다 드러낼 때다. 못 배운 것이 죄지은 것도 아니니 부끄럽거나 창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많이 배우고 돈 많이 모아놓고도 저세상으로 일찍 떠나는 사람을 보면 그것도 별거 아니더라. 나는 못 배웠기에 바쁘고 힘들어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인정도 받게 되더라.  


나는 돈을 많이 모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나 비록 외적(外的)으로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내 속 사람은 나름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짧은 가방끈이 내게 준 행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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