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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대 Oct 28. 2020

눈뜨고 걸으며 잠자며 꿈 꾼 이야기

나는 인쇄분야와의 인연이 깊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언덕배기에 털보 곽 씨가 운영하는 봉투 공장에서부터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이 훨씬 지났다. 한남대교가 생기기 전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 참외밭에 정화조 오물을 퍼다 버릴 때 이야기다. 공장이라 했댔자 수동형 석판 인쇄기(오프셋 인쇄방식의 일명 데비끼) 한 대를 놓고 일하며 먹고 자는 곳이다. 한남동과 보광동 경계 꼭대기에 있는 한광 교회 아래다. 한남동 버스종점에서 보광동 쪽으로 팔부능선쯤 올라가야 된다.


옷이나 신발을 팔 때 담아 주는 종이 쇼핑백을 만들었다. 오전에 집을 나올 때는 키만큼 높이의 밤새 만든 봉투 뭉치를 메고 나와 납품을 하고 나서 봉투나 인쇄물 주문을 받는다. 온종일 시내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 등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주문받아 온 봉투 만들 종이(주로 크라프트지)를 사기 위해 중구 주교동 방산시장엘 간다. 인쇄 관련 업체 '방산 문화사'라는 곳에 들려 미리 맡겨 둔 아연 오프셋 인쇄 원판과 종이를 메고 한남동 집으로 간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용지에 인쇄를 하고 밤새워 봉투를 만든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 만들어진 봉투에 손잡이를 만든다. C자형으로 된 일종의 펀치를 봉투 아가리 부분에 대고 망치질을 하거나, 세 군데씩 펀치로 구멍을 뚫어 비닐 줄을 끼운다, 그걸 메다 납품을 하고 나서 영업활동을 하는 식으로 날마다 반복된다.


당시 퇴계로를 지나는 41번 서울여객 버스를 타야 한남동엘 간다. 방산 문화사는 방산시장에서도 을지로 쪽보다 청계천 쪽에 더 가깝다. 종이가 무겁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무거운 걸 메고 아마 1킬로미터는 족히 걸어야 될 것이다. 을지로 전차 길과 중부시장을 지나고, 오장동 길을 지나 퇴계로 큰길 육교를 건너기가 쉽지 않다.


자주 가던 방산시장은 특징이 있다. 각종 박스 만드는 종이, 인쇄용지, 포장용지 등 종이를 많이 취급한다. 그러다 보니 재단기(裁斷機)가 많다. 땅콩가게도 많다. 그곳에서 일할 때는 땅콩 볶는 구수한 냄새가 온 거리에 퍼졌다. 비닐제품도 많다. 밀가루를 많이 취급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비닐류, 밀가루 등 제과점 재료, 제과점용 기구, 기계를 사려면 전국에서 방산시장을 찾는다.


봉투 공장에서 1년 반 동안 일하고 있을 때다. 거의 매일 들리던 방산 문화사 김 사장이 그간 나를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쉽게 말해 스카우트  것이다. 그곳에서 2년 넘게 일했다. 전지용 인쇄기와 4절지용, 베이비 오프셋 인쇄기가 있으며 제판(製版) 시설과 종이 재단기도 갖추어져 있다. 나는 그곳에서도 좀 부풀려 표현하자면 뼈가 부러지게 일했다. 당시 인쇄소라는 곳에는 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독촉을 받다 보니 늘 바쁘다. 특히 선거를 앞두거나 시월쯤부터는 내년에 쓸 달력과 인쇄물 제작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잠 안 오게 하는 약을 먹어가며 며칠씩 잠자지 않고 일을 자주 했다. 한 번은 3일간 잠을 못 자고 일하다가 일을 더 할 것이라고 약을 먹었다. 이게 웬일인가. 잠이 쏟아진다.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다. 막내 신입사원이 사고(?)를 쳤음을 나중 알았다. 잠이 안 오게 하는 약 대신 잠 오게 하는 약을 사다 먹인 것이다. 3일 동안 잠자지 않고 일한 사람에게 수면제를 먹였으니 오죽하랴. 생각해 보면 며칠 동안 밤새워 일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게 여겨져 막내가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 아랫목에 왼쪽 팔을 베고 잠들었다가 깼더니 왼쪽 팔뚝이 따갑고 쓰렸다. 옷을 걷어보니 살이 익어 부풀어 올랐다. 내 왼쪽 팔꿈치 부근에 지금도 거무스름한 상처 자국이 있다.  


잊히지 않는 일이 또 있다. 누가 들으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동대문에서 신설동 방향으로 걸어갈 때다. 눈을 뜨고 걸으며, 잠을 자면서 어렴풋이 꿈을 꿔 본 적이 있다. 전봇대에 부딪히고야 깼다. 얼마나 잠을 못 자고 피곤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만큼 고생했기 때문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일하던 그때가 아련히 떠오르며 그 시절이 그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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