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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Aug 02. 2020

팬데믹 백수의 골방 속 영화 감상: 태극기 휘날리며

전쟁 영화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포스터


코로나19가 만든 '팬데믹'은 모두를 타격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비로 인한 피해나 사상자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쪼록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비구름이 물러가기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나 폭우로 인해 생겨나는 재해 상황 대처를 '전쟁'에 비교하고는 합니다. 효율성을 극대화 하고 생존만을 목적으로 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팬데믹 상황에서 전쟁 영화를 찾아보게 된 이유입니다.


전쟁의 반댓말은 평화가 아닌 '일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유가 이데올로기든, 민족이든, 전쟁으로 인해 개인은 다시 일상을 살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게 되죠. 생각해보면 전쟁은 개인과 상관없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하지만 곧이어 강국들에 의한 분단, 그리고 북한의 불법 선제공격. 남한에서 평화로이 일상을 살고 있던 분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제 생각엔 좋은 전쟁 영화는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불을 지펴 또 다른 전쟁 가능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 그리고 희생된 애국선열에 대한 애도가 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귀한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오늘 다루는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입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좋은 전쟁 영화가 많습니다. 하지만 굳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다루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중이라는 것입니다. 분단 중이기 때문에 새로운 전쟁 영화가 탄생할 여지가 많습니다. 전쟁 영화에 대해 심각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이 영화는 '반공' 영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반공을 울부짖는다면 다른 영화를 본 겁니다. 아니면 이미 머릿속이 북한으로 가득 차있던가요. 하지만 반공 척결을 내세우는 자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그 생각에 대해 차근차근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태극기 휘날리며'의 어떤 요소가 1000만 관객을 이끌고 한국 최고의 전쟁 영화로 자리잡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반전 영화일까요, 반공 영화일까요? 지금부터 '태극기 휘날리며'의 메시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후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기 살벌하시네요


- 한국전쟁 중 낙동강 전선 수호 중 큰 공을 세워 무공훈장 수여

- 하지만 1.4후퇴 후 북한으로 전향해 선전에 앞서는 동시에 한국군 사살 작전 참가

- 사망 당시 북한군 소속


한 인물의 인생입니다. 분명 칭송 받기엔 그르친 이력입니다. 전쟁 중에 북한으로 전향했고 사망 당시에도 북한군 소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을 빨갱이, 혹은 배신자로 몰아가긴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말이죠. 전쟁이라는 큰 역사적 흐름에 휘말린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인간은 단편적이지 않고 참으로 복잡다면한 존재입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 이진태의 일생입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던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침공을 시작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딸기맛 아이스께끼를 나눠먹는 형제. 보통 우애가 아니다


영화는 형인 이진태(장동건)와 동생 이진석(원빈) 가족의 행복한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아주 잘 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행복합니다. 이 영화가 초반 이들의 행복한 일상을 보여주는 이유는 '전쟁의 반댓말은 일상'이라는 격언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초반 장면 그 어디에서도 북한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나오지 않습니다.


진태와의 결혼을 준비하던 영신(이은주)이 물장구 치고 노는 가족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일상의 소중함을 관객에게 알리죠. 하지만 진태 가족의 마음도 모른 채 한국전쟁은 시작되고 맙니다.


감독은 초반에 한 장면을 더 넣습니다. 바로 보도연맹입니다. 영신은 보도연맹 가입을 하고 보리와 쌀을 받아옵니다. 그녀가 공산주의자라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영화가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반공 영화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영화의 목적은 단순 서류에 올라와 있다는 이유로 학살하던 국가의 폭력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데 있습니다. "빨갱이를 색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반공주의자의 논리를 무참히 깨버리는 인물이 '영신'입니다.


기차가 느리게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태의 가족이 피난길 끝에 도착한 곳은 대구였습니다. 그 곳에서 학도 의용대 참가를 부르짖는 자가 나옵니다. "조국의 땅을 지키자!"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진태는 이 인물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하지만 사람 일, 한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곧 진석이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진태도 전선으로 가는 기차에 뛰어들어갑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죠. 이렇게 둘은 전쟁에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일상은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됩니다.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생겨난 전쟁 앞에 개인은 너무나도 나약합니다. 진석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포탄이 쏟아지는 데 도망도 제대로 못 칩니다. 포탄 조각이 팔에 박히고 울기 바쁩니다.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그는 아직 전쟁을 버티기에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가족의 보호를 받아야 할 미성년자이자 개인입니다. 국가는 전쟁을 이유로 미성년자 보호 의무를 포기합니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건 온전히 개인의 몫, 진석에게는 그 몫이 너무 버겁습니다.


동생을 집으로 보내는 게 그가 목숨을 던진 이유다


그 몫을 함께 짊어지는 인물이 진태입니다. 진태는 전쟁 속에서도 강한 개인처럼 보입니다. 지휘관에게 가 동생을 후방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김일성 목이라도 따오겠다고 말할 정도죠. 아무리 우애가 좋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건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럼에도 진태는 기꺼이 진석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진석은 이러한 형의 결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 둘이 함께 있는 부대는 위험에 빠집니다. 2대대와 3대대가 격파 당하며 부대는 고립되고 맙니다. 부상자는 속출하고 자살하는 자까지 나타납니다. 이 상황에서 영만과 임 하사가 싸움을 벌입니다. 


영만(공형진)이 후벼 파는 대사들은 전쟁의 본질을 말한다. 전쟁의 본질은 '빈 껍데기'라는 것을


영만은 인간 대우를 받길 원합니다. 북한군이고 뭐고 일단 배고프다는 거죠. 그와 반대로 임 하사는 군인 정신, 국가를 강조합니다. 둘은 멱살을 잡으며 갈등을 빚습니다. 그러면서 영만이 말합니다. "사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제 때는 나라라도 구하려고 싸웠지, 이건 뭐야?" 이에 대한 임 하사의 대답은 "빨갱이" 였습니다.


임 하사가 이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그는 이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잘 모르지만 그 역시 '가족'을 중시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가족을 잃게 만든 장본인인 '빨갱이'들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당시 대부분은 영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의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 그리워 사진을 보고 어떻게든 살고 싶은 욕망 뿐입니다. 누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전쟁에 참가했을까요? 영만과 임 하사 모두 전쟁 앞에 흔들리는 나약한 개인들이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요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진태는 기습작전을 생각해냅니다. 밑져도 본전, 지휘관은 기습작전에 찬성하고 진태는 맹활약을 펼칩니다. 분명 진태는 강해보입니다. 총알도 맞지 않고 적을 가뿐히 사살합니다. 하지만 진태 역시 전쟁 앞에 나약한 개인입니다. 그는 전쟁을 잘 수행하는 군인보다는 '광기'를 지닌 인물에 가깝습니다. 목숨은 버린 채 쏟아지는 포격에 달려들고 북한군의 눈을 파서 죽입니다. 만약 이 영화가 반공 영화였다면 진태는 적군을 더욱 고상하고 멋지게 죽였을 것입니다. 반공 영화가 아니기에 끔찍하게 적을 죽여 나가죠.


진태 역시 나약한 개인임을 보여주는 또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가족을 경시하는 장면이죠. 기습 작전 성공 후, 진태는 UN과 함께 인터뷰도 하는 등 모두의 칭송을 받습니다. 진태는 진석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목적은 잊은 채, 가족을 소중히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영신에게 편지를 보내자는 진석의 말을 귀찮아합니다. 그는 무공을 세우는데만 집중하고 모두의 칭송에 취해있습니다.


진석은 그러한 진태를 아니꼽게 봅니다. "무공 훈장이 총알을 비껴간대?" 그는 모두가 주목하는 자유민주주의 투사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미 진태는 전쟁이라는 시대흐름에 종속된지 오래입니다. 진태는 멈추지 않고 전쟁 공을 세워나갑니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분명 진석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자를 막았습니다. 전쟁 영웅을 전쟁에서 활약하지 못하게 하다니. 그렇다면 진석은 자유민주주의에 해가 되는 인물일까요? 아마 영화를 보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대사에 공감하는 분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이데올로기, 무공훈장 등 이 모든 게 가족과 인간에 비해 너무나도 허망한 존재라는 게 진석과 영화의 생각입니다.


영만의 죽음은 누구의 탓인가


이후 부대는 평양 수복작전까지 참가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태는 분대장으로서 무리한 작전을 명령하죠. 도망가는 북한군 지휘관(여기서 최민식이?)을 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작전 수행 중, 영만이 사망하고 맙니다. 이제 진석은 좋은 말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인 진태에게 분노해 말들을 쏟아냅니다. "이제 영만의 자식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아이스께끼를 나눠 먹을 만큼 친하던 그들을 가른 건 다름 아닌 전쟁이었습니다.


진태와 진석의 갈등 장면은 전쟁으로 인한 형제의 갈등 그 이상을 나타냅니다. 뒤를 보면 평양 주민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군, 북한군 할 것 없이 시체를 뒤집으며 가족의 생사를 확인합니다. 한국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가족이 우선인 셈입니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가족을 잃어가면서 얻는 건 하나도 없는데, 이 얼마나 덧 없는 전쟁입니까?


설산을 가득 메우는 중공군


덧 없는 전쟁을 채워나가는 건 적대감입니다. 북한군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우물 속에 폭탄을 숨겨둡니다. 이로 인해 진태의 부대원이 부상을 입죠. 불어나는 적대감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북한군조차 포로로 남기지 않고 학살합니다.


이 과정에서 '용석'이라는 진석의 친구를 만납니다. 그는 한국군이었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진태의 눈에는 그저 빨갱이일 뿐입니다. 진태는 용석에게 총구를 겨누며 학살을 자행하려 합니다.


이 때 진석이 나타나 일침을 가합니다. "민간인 학살하는 빨갱이와 뭐가 달라? 다 똑같아, 다 미쳤어." 나약한 개인들은 미쳐갑니다. 이제 목적도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진행되는 전쟁에서 포로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니, 이것이 과연 자유민주주의인지... 아이러니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결국 11월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후퇴 중 진태는 용석을 사살합니다.


보도연맹 사건. 분명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근현대사다


진태와 진석은 서울에 도착합니다. 이제 영화는 완전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죠.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영신은 보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이유는 공산주의 신봉이 아닌, 보리와 쌀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광풍은 그런 걸 고려해줄 여유가 없습니다. 우익 청년들은 영신을 데리고 가 사살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말리는 진석을 향해 '빨갱이'라고도 말합니다. 방금까지 전쟁을 겪고 온 용사에게 빨갱이라니. 자신을 반대하는 자에게 빨갱이라고 하면 그만이니, 참 편한 논리입니다.


영신은 학살 과정에서 갖은 모욕을 당합니다. 우익 청년은 영신을 향해 '화냥년'이라고도 소리칩니다. 그리고 소란이 벌어지는 틈에 영신은 우익청년의 손에 죽고 맙니다. 이를 본 진태, 한국에 대한 정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는 순간 이 영화는 반공영화가 아님이 자명해졌습니다. 전쟁이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이데올로기를 악용하는 자와 눈 뜨고 당하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괜히 국방부의 지원을 못 받은 게 아닙니다. 실제로 국방부는 '애기섬'이라는 여순 사건을 다룬 영화를 지원한 후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출처: 동아일보 '국방부, 태극기 휘날리며 대박에 당혹감') 그로 인해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는 '태극기 휘날리며' 지원을 거부하게 됐죠. 다시금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돼서였습니다. 즉, 반공을 내세우지 않았기에 국방부는 이 영화를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반공 영화가 아님을 국방부가 대신 증명한 셈입니다.


새로운 영화 출현해주세요ㅠ


진태와 진석이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리면서 둘은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그나마 진태는 무공훈장이 있기에 나올 수가 있었지만 진석은 계속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가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됐고 한국군은 후퇴하면서 포로 수용소를 불태워버립니다.


이제 진태에게는 한국군과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영신을 죽인 것도, 죽진 않았지만 진석을 죽이려고 한 것도 한국입니다. 진태는 북한군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선전에 대대적으로 나서게 되죠.


이후 정말 중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다행히도 진석은 죽지 않고 빠져나와 전역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대전에 머물며 심신을 치료 중인데 형의 전향 소식을 듣습니다. 전향 소식을 들은 건 진석만이 아닙니다. 앞서 빨갱이 척살을 외쳤던 임 하사가 진석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임 하사는 진태의 선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에겐 이데올로기가 곧 종교이니까요. 흔히 종교를 버리는 행위를 '배교'라고 합니다. 배신이죠. 이데올로기를 변경한 진태는 배신자입니다. 하지만 진태에겐 이데올로기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자 형제입니다. 그는 가족을 파괴한 조국을 공격하게 위해 전향한 것입니다.


장동건의 최고 연기였다


진석 또한 이데올로기의 무기로 사용되려 합니다. 진석의 목소리를 통해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려고 하죠. 하지만 진석은 강한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형에게 달려갑니다. 이제 진석은 진태보다 강합니다. 아니, 이 영화에 출연한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인간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의 공습이 시작됩니다. 북한군들 역시 픽픽 쓰러져가며 그들도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형, 진태를 만납니다. 진태의 눈은 증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렇기에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단어만 빨갱이에서 조국의 반동분자로 바뀌었을 뿐, 전쟁광인건 그대로였습니다. 장동건의 흰 자를 보여주는 연기가 그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 증명해냅니다.


결국 진태는 다시 동생, 진석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진석을 도망가게 하고 총구를 북한군에게 돌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길 위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때문에? 아니면, 동생을 지켜주기 위해서일까요? 모두들 답을 알 겁니다.


살아남는 건 전쟁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아무런 공이 없는 진석이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진석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로써 영화의 메시지는 명확해집니다. 전쟁에 남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데올로기도 하찮기 그지 없습니다. 그저 가족을 지키고 사람을 지키는 자가 강한 자이고 살아남는 자였습니다. 왜 전쟁을 해야만 했는가, 더 이상 전쟁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영화는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표적인 매파다


한국의 전쟁을 논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죠.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보좌관 취임 전부터 면접과정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선제타격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력을 통한 북한 문제 해결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볼턴은 미국인입니다. 북한을 선제타격 한다면 그에 대한 피해는 온전히 한국의 몫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전쟁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한다면 진태와 같은 나약한 인물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조국이 나를 배신하고 가족을 죽였을 때도 계속 애국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전쟁의 광풍 속에서는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상을 영영 잃을 수도 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말합니다. 함부로 전쟁을 말하지 마라. 함부로 분노하지 마라. 그리고 이데올로기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담은 메시지는 참으로 좋습니다. 이데올로기과 생존보다 더 높은 이상, 즉 인간과 가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태극기 휘날리며'는 좋은 반전(反戰) 영화입니다. 다시 한국에 이러한 전쟁 영화가 탄생하길 기원합니다.



재밌는 전쟁 영화 하나를 살펴보았는데요! 그렇다면 어떤 영화가 안 좋은 영화인지도 알아봐야겠죠? 다음엔 어떤 영화가 좋지 못한 전쟁 영화인지 리뷰하겠습니다. 비 조심하고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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