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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혁 Sep 02. 2020

믿음에 관하여

영화< 그 후> 감상





: 뭐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뭐라도 물어봐도 되나요? 왜 사세요?

봉: 왜 사냐고? 몰라 그걸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나 우리가 태어난 것도 우리 뜻대로 된 게 아니잖아 그지?

: 왜 사시는지 모르세요 그럼?

봉: 뭐, 사랑? 뭐 그런 말 하나 하면 돼? 그럼 뭐, 다 아는 거야?

: 모르시는 거네요, 정말로,,,

봉: 뭐 알 수가 있어야지 알지,, 안 그래? 뭐 말로 하나 지어내 가지고 열심히 믿는다고 그게.

     그런 건 진짜랑 전혀 상관이 없는 거거든 그냥 말로 말을 지어낸 것뿐이지... 그런 건 진짜랑 상관이 없어요.

    진짜는 따로 움직이는 거야

: 믿지 않고 사는 게 좋으세요? 진짜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해요?

봉: 아니야, 믿고 싶어, 믿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믿고 싶지. 근데 뭐 나 편리하자고 아무거나 믿을 순 없잖아.

: 아니요 아무거 나가 아니라 진짜 믿는 걸 찾으면 믿는 거죠. 

봉: 그니까, 그래 정말 믿는다는 게 진짜 실체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해보는 거죠. 믿는다는 거 맞는다는 거 아니까 그냥 해보는 거죠.

봉: 그니까... 실체가 말로 잡히는 거냐고 이게,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

: 읽어봤어요 그런 것들, 근데 실체가 뭔데요?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 없는 걸 안다고 아는 양 전제하는 게 그게 거짓말 아닌가요? 오히려

봉: 없는 건 아니지, 그니까,,,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거지 느낄 순 있는 거야

: 느끼세요...? 실체를? 그게 그 느낌이 실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아니 그것도 마음이 지어낸 허상인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봉: 하여간 말로 정리된다는 건 실체 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왜? 그건 일단 너무 조악해 그런 거는.

: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 게으르거나 비겁한 것 같아요. 믿는 걸 찾아내서 그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기                  싫은 거죠, 힘드니까.

봉: 열심히 사는 거 좋아하는구나

: 믿는 걸 찾아 내야 되는 거죠, 그 믿음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하면 되는 거지 아니 무슨              알지도 모르는 실체라는 허상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당장 필요한 믿음을 거부하는 건 엉뚱한 짓 아닌가요?



    소위 지혜라 불리는 것은 체험에 의해서 얻어진다. 살면서 언젠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오기 마련인 정신적 고양의 순간에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종이 울리는 것만 같은 순간 말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이며 '나'란 인간의 존재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분에 휩싸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감정, 느낌들은 마치 안개처럼 다가온다.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고 그 실체는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그 안개 뒤에 분명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만 같지만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을 때 우리는 거기서 알아보는 것을 멈추거나(대개의 경우) 안갯속을 뚫고 지나간다.



여태껏 나는 안개 뒤에 희미한 '무언가'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치 손에 쥔 것 마냥 들떠있었고

무언가가 거기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빠져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내 삶은 이미 한 발 더 나아갔으며 정신은 고양되었다고 느꼈다. 


모호한 상태로 두었던 시간이 길수록 형체는 더 희미해져 갔고 나는 희미하게나마 남은 그 느낌을 나는 파헤치기보다 있는 그대로 두었다. 단지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만을 강화해 왔던 것이다. 그런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말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내 철학'이라는 말로 포장했던 것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이지 허영심 가득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니체에 관한 글을 쓸 때 나는 항상 자기 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만 사실 나 조차도 내 언어로 정리하지 못했던 느낌을 내 믿음이라고 믿으며 오만하게 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실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를 정의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일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름의 대사를 듣고는 문득 아름의 말처럼 일단 해보고, 일단 믿음을 찾아내고 그 믿음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노력이라도 한 후에야 그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논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을 잘못됐다고 느껴지면 뜯어고치면 그만이니까. 


사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딘가 있다고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정말 무엇인지 언젠가는 정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지 내 삶에 어떤 방향을 잡아 줄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인지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태해진 나는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았고 믿음을 구하기를 포기했다. 싸워서 쟁취하는 과정,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프고 괴로우니까, 말로 정리하기 힘들고 귀찮으니까 자꾸 미뤄왔던 것뿐이다. 변명은 없다. 비겁하고 게으른 내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비겁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구하라고 말하는 아름. 믿음. 어떤 형태의 믿음이던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믿음 자체를 내가 가지고 있는지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믿음 없이 사는 게 가능하긴 하냐고.

내가 정말 믿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단지 그 믿음을 찾아내는 과정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일 수도.



아름의 믿음.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거,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걸."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 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사실은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걸 믿어요.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


언제든 죽어도 괜찮다는 말. 이상하게도 죽음의 믿음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 세상을 온전하게 산 사람만이 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온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날이 오면 좋겠다. 나부터가 급선무이긴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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