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의 구인광고
한동안 우중충하고 쌀쌀하던 날씨가 풀렸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동네 산책을 나갔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빛의 입자는 손에 잡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검색해 보았지만 양자역학과 입자-파동성이론으로 설명하는 광자(光子)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잠시 보다 껐다. 문송합니다...
잠시 세탁소에 들러 맡겼던 옷을 찾고, 평소 잘 가지 않는 길로 조금 돌아서 가기로 했다. 주변에 사소한 것들이 눈에 조금 더 잘 들어오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시는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 파란 하늘로 우뚝 솟은 건물 끝에 걸린 뭉게구름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좋았다.
긴 계단을 내려오다가 중간에 있는 벤치에 붙은 전단지를 보았다. 며칠 전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전단이 벽에 붙은 것을 보고서 주변에 있는 전단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였다. 한국 전봇대에 붙은 과외 전단지처럼 오징어 다리(?)가 몇 개 뜯긴 전단지였다.
사람을 구합니다.
당신이 주제를 주면, 제가 시를 씁니다.
값은 내고 싶은 만큼 내세요.
1월 21일 토요일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
태평산가에서 만납시다.
너무 신기한 광고였다. 이름도 연락처도 없이, 시간과 장소만 있는 구인광고라니. 이 시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새로운 자극과 글감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시를 팔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사람이 만나고 싶었던 걸까.
연락처가 있어야 할 오징어 다리에는 그가 생각했던 주제들이 적혀 있었다. 나처럼 이 전단지를 발견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뜯어 갔는지 다섯 개가 남아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같은 전단지를 두 개 더 보았는데, 하나는 첫 전단지와는 조금 다른 주제들이 사라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들 왕래가 조금 더 많은 자리였는지 오징어 다리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시인이 적어둔 주제들은 이랬다.
사랑해, 너는 바다야 我愛你, 你就是一片海水
나는 늙어가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늙어가고 我在變老,愛過的人也在變老
연꽃씨가 쓴 것은 심(心)이 있기 때문이다 蓮子很苦,因為有心
시는 고독의 산물이다 詩是獨處的產物
당신이 내가 남은 걸 비난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이 떠난 걸 원망할 수 있겠어요 你沒有責怪我留下來,我怎能抱怨你的離去
당신이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는 늘 당신의 영혼이 울릴 때 每次你哼歌,都是靈魂作響的時候
살아남은 것은, 좋은 사랑을 위해서 活下來是,為了好好的愛
반신반의할 때는 믿는 쪽을 선택하라 半信半疑時,選擇半信
그날 태평산가에는 몇 명이나 모였을까? 시인은 만족할만한 시를 쓰고, 만족할 만한 가격을 받았을까? 그 시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따뜻해졌을까? 열흘 전 그날 태평산가로 가고 싶다. 광둥어로 낭독하는 시는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그 마음이 느껴질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