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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Apr 13. 2023

별을 스치는 바람

책 읽기 프로젝트 50 #42

여행을 떠나기 전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검색했다. 추천 소설이 여럿 나왔다. 그중에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하나 있었다. 이정명 작가의 <별을 스치는 바람>이었다. 제목에서 벌써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떠올랐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 시인이 있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주에서 군인 생활을 했던 잔인한 간수 스기야마 도잔이 살해된 채 수감동에서 발견되었다. 죄수들은 모두 감방에 있었고, 살인범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다. 소년병으로 징집된 교토 출신의 와타나베 유이치가 스기야마 도잔 살인사건의 조사원으로 발탁된다.


살인범을 찾기 위해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만주의 전쟁영웅,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잔인하게 죄수들을 고문해 자백받아내거나 독방으로 보내버리던, 형무소 입장에서는 모범 간수였다. 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죄수들이 외부와 주고받는 편지나 책들을 검열하던 검열관 직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한 편의 시를 보게 된다.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 시(詩)는 말의 사원이지요.“ p.294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P.210


징집되기 전 와타나베 유이치는 교토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도와 그곳에서 일했다. 책을 사랑하던 소년이 전쟁의 부름을 거부하지 못하고 차출된 것이다. 그런 그가 보았을 때 스기야마에게서 발견된 아름다운 시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욱 큰 의문을 품게 된다. 간수장과 형무소장은 와타나베가 이른 시일 내에 범인을 찾아 사건을 종결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의문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기야마에게서 발견된 시를 통해 스기야마 간수가 형무소 내 조선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다는 걸 알게 된다. 최치수, 히라누마 도주 등의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그렇게 와타나베도 스기야마의 발자취를 따라 조선인 죄수들과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인 동시에 추리소설이다. 형무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살인사건의 추리와 그 뒤에 숨겨진 더 큰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와 문학의 아름다움, 그를 통해 보는 희망과 절망,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으로, 조선인 시인으로 살아왔던 히라누마 도주 — 윤동주 시인의 아픔 등이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죽음은 일상처럼 무감각했고, 사람들은 공포라는 등짐을 지고 살았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시대였다. P.481
나는기억이 질긴 근육 같아서 쓰면 쓸수록 선명해지고 행복한 기억은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할 거라고 믿었다. P.513


후쿠오카 여행에서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갔다. 윤동주 시인이 수감되었던 그 건물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지만, 소설 속에 언급되었던 제3수감동, 독방 건물, 사망한 조선인들이 묻혔던 무덤터들이 이즈음 어딘가 있을까 생각하며 그 바깥을 한 바퀴 돌았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잊게 만들어 조용한 주택가, 학교들로 채워진 이 형무소 주변에서 과거에 있던 일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새삼 윤동주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그의 삶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無),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잊지 않아야 돌이켜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666


윤동주 시인의 삶의 마지막에 상상을 더해 쓴 이 소설이 좋으면서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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