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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몌별 Oct 13. 2024

2. 북유럽을 여행하며 만난 남자

나는 결혼하기 전 '역마살'에 낀 듯 이곳, 저곳을 여행 다녔다.  


사회적으로 결혼을 할 시기가 되었을 무렵, 나는 여전히 세계를 갈망하고 내 한계선을 좀 더 높은 곳에 긋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유럽에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서유럽에 갔을 때도 하루 만에 결심하고 여행을 추진했던 것처럼 북유럽도 그렇게 하루 만에 티켓팅을 하고 약간의 준비만 하고 바로 떠났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였을까? 서유럽만큼의 설렘도 없었고, 엄청 신기하지도 않았다. 무엇을 본다기보다는 서른이 넘어서 떠났던 여행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여행지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책에서 말하는 나라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해석으로 그 나라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북유럽 디자인이 유행하기 전, 그곳에서 북유럽풍의 모던함과 깔끔함이 주는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오슬로에서 뭉크에게 푹 빠져 거대한 피오르드보다 뭉크 박물관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같이 갔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날 뭉크 이야기를 반나절 들은 것 같다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분단국가의 아픔과 한국의 위상을 잘 알고 있다는 해박한 지식을 뽐내던 하얀 머리 할아버지도 기억에 남았다. 


출처 : 픽사베이


그 많은 기억들 속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스톡홀름 카페에서 긴 이야기를 나눴던 남자와의 대화이다. 


그날은 스웨덴 시청 투어를 마치고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친구가 쉬고 싶다고 해서 일찍 호텔로 들어갔다. 일찍 저녁부터 자고 있는 친구 옆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다가 문득 이렇게 스톡홀름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구에게 밖에 다녀온다고 하고, 혹시나 모를 위험 상황에 대비해서 핸드폰을 챙겨 낮에 다녔던 곳 위주로 시내로 나섰다. 


고소한 와플 굽는 냄새를 따라가다 보니 골목길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금방 구운 와플콘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나오니 엄청 '낯선 골목길'이었다. 돌고 돌아도 내 기억에 호텔로 이어지는 길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스마트폰 시대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던 시절이라 핸드폰으로 찾을 수도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자고 있었던 건지 통화도 되지 않았다. 호텔로 전화를 할까? 하다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좁은 골목길에서 나와 우선 큰길로 나왔는데, 순간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 보였다. 조그마한 동양애 하나가 이 밤길에 돌아다니며 길을 묻는다면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살피다 유모차를 이끌며 지나가던 한 남자를 보았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남자라면,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호텔로 가는 길을 물었다. 친절히 알려주더니 갑자기 그 남자가 잠시 얘기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이가 있어서였을까? 그냥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알겠다고 했다. 


출처 : 픽사베이


남자는 부인에게 전화해 동양애 하나를 봤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잠시 카페에서 얘기를 하고 가도 되냐고 허락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웃긴 상황이었는데, 그저 여행의 묘미랄까? 계획하지 않은 일이 생겨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한국에서 온 여자애가 혼자 밤길을 다닐 수 있는 것에 우선 놀랬고, 한국의 치안과 한국의 영어, 경제, 교육, 복지 수준에 대해 궁금해했다. 10년도 넘은 대화인지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국의 우수한 경제 성장에 감탄했고, 한국과 북유럽의 복지 정책과 세금에 대한 것에 대한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가 남자인데 어떻게 길을 물을 생각을 했냐고 묻길래 솔직히 아기아빠라면 안전할 거 같단 생각이 들어 물었다고 했다. 육아휴직 중이라던 남자, 부인은 일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남성의 육아휴직이 허용이 된다 하더라도 강심장 아니고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기에 그의 육아휴직 이야기도 신선했고, 유모차를 밀고 있던 그의 모습조차도 신선했던 것 같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요즘엔 유모차를 미는 남자의 모습이 보편화되어 있고, 남성의 육아휴직도 보편화가 된 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든다. 그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텔로 가는 큰길, 익숙한 길 근처까지 안내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북유럽에서 처음 본 남자와 카페에서 한 시간 동안의 낯선 대화.

그 상대가 아기 아빠여서 막연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그날. 그 밤.

설레는 사랑의 감정도. 엄청 대단한 대화도 아닌. 


그저 호기심으로 출발한 대화였지만, 현재의 삶과 동떨어진 먼 나라에서 온 서로의 삶에 대해 묻고, 알아갔던 그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럴듯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지만, 평범했던 그날의 여행 이야기가 나에게 특별했다면, 그날의 여행은 특별한 선물 같은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오래전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글로 써 보니 두근두근 설레고 즐겁다. 


@지혜롭게, 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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