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살아내 지더라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사실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학급 아이들에 대한 관성적인 책임감으로 나도 모르게 그냥 오늘만, 오늘만이라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다녔다.
'요즘 젊은 선생님들은 재미가 없어. 술 하나 따를 줄도 모르고.'
회식자리에 늘 학부모회가 함께 했다. 그중 한 명은 나에게 술을 따르지 않아 재미가 없다고 들으란 식으로 크게 떠들었다.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은 남자 선배도 있었다. 너무 놀래서 화장실에 가서 우는 데 여자 부장이 나를 위로해 주며 말했다.
"에구, 온실 속 화초구나. 사회생활 하려면 블루스도 추고, 술도 좀 따르고 해야지."
수업시간 중에는 교감이 들어와서는 뒷 게시판에 있는 아이들의 작품을 떼어냈다. 그리고 교실 가구들을 옮겼다. 수업 중에.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업 시간 중에 전화는 수시로 왔다.
"야~빨리 여기로 와봐."
나는 '선생님'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 직장에서 '야!"라고 불렸다. 그렇게 나의 호칭은 어느새 '야'가 되어버렸다. 수업 중에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2학년 아이들을 두고서. 이유는 학교 감사로 온 장학사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1년을 그 학교에서 보내고 다음 해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곳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적어도 학부모가 같이 회식 자리에 함께하는 것은 없었다. 신체 접촉이 당연시되지도 않았다. 여전히 술을 따라야 하는 분위기였지만, 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선생님'으로 불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6개월이 지나도,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던 손가락 부기가 정말 기적처럼 한 달 만에 싹 다 빠졌다. 통증도 없어졌다.
나를 바라보며 애통해하던 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악을 들으며 매일을 미친 듯이 걸어 다녔다.
그리고 가방에 놓여 있던 사직서를 찢어 버렸다.
시간이 지난다면 이겨내지고, 살아내 진다는 말이 난 무슨 말인지 안다.
그때는 내 상식 선에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 버거웠다.
그래도 그 시간을 견뎌내니 살아내 지더라. 그리고 살아가더라.
몇 년이 흐르고 나를 "야"로 부르던 분을 찾아갔다. 롤케이크를 사고서.
"어서 와. 잘 왔네. 잘 왔어. 고마워. 찾아와 줘서."
그렇게 밉던 사람이,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이 내가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한 마디에 나는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 상황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한 용서일지라도 나는 용기 있게 그녀를 용서했다.
힘든 상황이 있더라도, 결국 지나다 보면.
좋은 일들도 찾아오면서 잊히기도 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도 하고,
담대하게 불의와 맞닿을 수 있는 담력도 생기기도 하니.
그냥 순간순간 나를 위로하며, 안아주며, 살아가다 보면, 살아가지더라.
@지혜롭게, 몌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