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간멀미

'품위 있고 싶은 어른'으로 오늘을 배운다

오늘도 품위를 배우는 중입니다

by 몌별

오늘 필사한 문장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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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어른이란 자신의 완벽함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약함과 실패를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어른의 품위>, 최서영



그 문장은 오늘의 나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아침부터 집을 닦았다.

시어머니와 아가씨가 잠깐 들른다고 했다.

유리창을 닦고, 거울을 닦고,

독한 세제에 손은 점점 거칠어졌지만

괜히 더 반짝이게 만들고 싶었다.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흐트러짐 없이 맞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국수가 먹고 싶다던 어머니를 모시고 만두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잘 드시던 분이 오늘은 '맛있다. 맛있다.'하시면서도 많이 드시지 못하셨다.

괜히 마음이 쓰였다.




아이의 학원 라이딩 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에 들렀고,

삼십 분쯤 함께 있다가 아이를 학원으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같이 올라왔다.



“자식들이 다 잘 살아서 참 좋다.”

웃으며 하신 그 말에

당신의 인생이 한 문장으로 접히는 것 같았다.




세 자녀 모두 결혼시키고,

모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의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어머니를 보며

행복이란,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차(茶)가 있어 좀 더 계시다가 가시라고 해도,

바쁘시다며 한사코 바로 가신다고 했다.

드릴 게 더 뭐가 없나 싶어 찾다가 귤 한 박스가 있어 바리바리 싸고,

아이가 읽던 책과 장남감을 조카들에게 주라고 하며 아가씨에게 전해줬다.



배웅을 해 드리고 휴.....겨우 한 숨 돌리려나 싶은데 눈 앞에 일들이 보인다.

어머니께서 가져다주신 반찬들을 정리하고,

잔뜩 쌓인 택배 박스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미뤄둔 에어프라이기 청소까지 해내니 점심에 먹은 게 다 소화가 되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허기졌다.

‘뭘 먹지?’

이 질문이 하루 중 가장 버겁다.



사실 모든 집안일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 먹는 것과 관련된 거다.

'뭘 먹을까, 뭐가 있지, 뭘 만들지, 뭘 사야 되지?'이다.

삼시세끼 안 먹어도 죽지 않을 텐데

가족들을 위해 내가 두 남자보다는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한다.




기껏 차려놓으면 다른 음식이 먹고 싶다 하고,

한 시간 넘게 서서 만든 음식 앞에서

‘잘 먹겠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 없이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이 먼저 움직일 때

마음이 먼저 식는다.




열두 해가 넘었으면

이런 장면에도 익숙해질 법한데

아직 나는

“맛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 다정한 말들을 기다린다.




이런 바람은

지나친 욕심인걸까?






집에 남은 샐러드와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어머니가 해 오신 음식도 간을 볼 겸 꺼내 놓았다.

그 앞에 잠시 앉아보려 했지만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간식을 챙기고 아들의 눈을 맞춰 이야기를 듣는 사이

내 몫의 식사는 어느새 의식속에서는 사라지고, 급하게 먹는 행위만 남았다.

여유있는 식사를 하는 품위있는 엄마이고 싶은데,

바로 또 수영 학원을 데려다 줘야 하는 엄마의 역할.




수영 학원은 늘 주차 전쟁이라 일찍 가서 두 시간쯤 기다리는 편이 낫다.

책 한 권을 펼쳤지만 피곤함 때문인지

활자는 옅은 회색 점처럼 흩어졌다.




먼저 퇴근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학원에 있다는 걸 알고 씻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반찬만 꺼내고 국만 데워 먹어도 될 텐데,

굳이 내 손을 거치려는 마음을 나는 이해하고 싶어졌다.




하루를 견뎌낸 끝에

누군가 차려준 밥 앞에 앉는 일이

그에게는 작은 보상일지도 모르니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외투만 벗은 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저녁부터 차린다.

과일을 씻고,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딸기를 꺼낸다. 제법 달다.





분명 밥을 먹고 갔다왔는데도 음식이 앞에 놓이면 또 앉게 된다.

이러니 살이 빠질 리가...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꼬옥 안아준다. 우리만의 경건한 저녁의 의식처럼.



그렇게 하루의 의식을 마치고 운동을 가려 했지만 너무 추웠다.

율무차를 데우고 쿠키 하나를 꺼낸다.

누군가 먹다 남긴 조청 유과도 함께.

다 먹고서야 운동을 갔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으려는데 아이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재워달라며 보챘다.



거실에서는 남편이 큰 볼륨으로 음악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고단한 하루 끝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너무 지쳐 팩을 하고 뜨거운 물에 오래 씻고 나왔다.

그런데도 아이가 아직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품을 바르고 거실로 나오니 프로그램은 이미 끝났고 광고만 흐르고 있었는데도

TV 소리는 여전히 컸다.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끝났으면 아이 옆에 있어줘.”

그 말에 남편은 화를 냈다.


“당신이 들어가서 재우면 되지 왜 나한테 이래.”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왜 화를 내지?'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씻고나와 준비하는 10분 동안

그는 이미 아이를 재우고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 시간을 몰랐고,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까 재우고 나왔어. 아이는 자요.”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대화는 엇나가고 말은 점점 다른 곳으로 흘렀다.

이게 이렇게까지 될 일인가 싶어 나는 그만하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태도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방에 찾아가서 말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지치고, 음악을 듣고 싶고,

가만히 쉬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하지만 그 평온한 시간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고.

청소한 손길, 음식을 준비한 시간,

아이가 하루의 리듬을 잃지 않도록 지켜낸 순간들,

그런 손길들이 당신의 노력 옆에 함께 있었기에

오늘이 이렇게 흘러갈 수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 나약함과 부족함을 소재로 글을 쓴다.




오늘 정말 최선을 다해 반짝였다고,

품위 있게 웃으며 하루를 건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멀었나 보다.

상대의 반응 앞에서

서운함과 나약함을 조금 날카롭게 드러낸 하루였다.




오늘을 돌아보며 조용히 다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품위를 잃지 않는 어른으로 살아가겠다고.





여전히

'품위 있고' 싶은 어른으로

오늘을 배운다.






@지혜롭게, 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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