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생의 코로나 타임라인
2020 봄학기는 '코로나'로 압축된다.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끝난 험난한 한 학기. 개강 직후, 1월 초엽일 때만 해도 바이러스는 먼 나라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국제뉴스 한편에서 잠깐 접하고 지나칠 단어인 줄 알았던 것. 결국엔 학기 도중 보스턴 전역의 대학들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봄방학 끝나는 지점부터 모든 강의가 온라인 진행으로 바뀌어버렸으니, 학생들은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툴툴거렸고 보스턴 지역의 유학생 상당수가 본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온라인 강의로 전환되었으니 시차가 달라지는 것에 적응할 자신만 있다면 꼭 미국 현지에 머물면서 비싼 생활비를 감당해가며 강의를 듣겠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다.
학교 문턱을 밟은 시간들을 손꼽아 보자면, 사실상 이번 학기는 ‘절반’ 짜리였던 셈. 종강을 앞두고 교수님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말도 안 되는 참으로 이상한 학기 잘 버텨줘서 모두들 고맙다"며. 네. 교수님도 놀라셨죠? 참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조심해, 넌 특히 더!
1월 첫 개강일, 딱 이틀 전에 미국에 들어왔던 터라 시차적응이 덜 됐던 날. 졸음 한 가득 품은 눈으로 월요일 수업에 겨우겨우 출석했는데 몇몇 동기들의 웅성거리는 수다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쩌고저쩌고,,, 저 친구의 남자 친구가 코로나에 어쩌고... 그래서 결국 지금 저 친구 사는 홈스테이 지역 사람들이 바짝 긴장해서 서로 경계하고 있다고... 우리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바이러스 조심'이라는 키워드를 학교에서 처음으로 쥐었던 날이다.
내가 second trimester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임산부니까 특히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며 '마스크'를 친히 권고했다. 미세먼지 한창 심할 때 한국에서 들어온 지라 다행히 마스크는 수중에 꽤 지니고 있었다만,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미세먼지에도 둔감한 나잖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충분히 가능한 시기였다. 설마 여기까지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들겠나?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는 남의 이야기 같기만 했던 새해 초 어느 날.
마스크는 쓸 필요 없다잖아.
손만 잘 씻으면 돼.
2월 어느 날의 저녁 강의, 교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화제로 문을 열었다. 강의실을 쓱 살펴보니 마스크를 쓴 친구가 딱 두 명 정도. 모두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다. 나 역시 가방 속에 고이 챙겨 오긴 했는데 괜히 쓰고 등하굣길에 올랐다가 내가 확진자가 된 듯 현지인들로부터 따가운 시선만 받을 것 같아서 꺼내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미국의 질병관리본부 C.D.C에서는 의료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마스크는 효과가 없으니 사용하지 말란 발표가 있었다. 정부기관에서도 쓰지 말라는 걸 뭐. 교수님 역시 마스크 사는 데 열 올리지 말고 '손을 씻으라'고 재차 강조하시네. 덕분에 학교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생일 축하노래를 두 번씩 부르게 됐다. 천천히 노래를 두 번 부르면 30초가 맞춰진다나? 개인위생을 위한 센스를 적당히 경쾌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손세정제가 너무 비싸서 못 샀어."
요만한 게 하나에 50달러가 넘더라는 볼멘소리. 주변에 둘러앉아있던 동기들도 깜짝 놀란다. 2온즈 한 병에 50달러? 말도 안 된다 면서 손사래를 치는 아이들. 그래도 난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은데? 학교 주변 편의점을 이곳저곳 들러봤지만 '핸드 새니타....이저'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솔드아웃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단호박 알바생들. 동이 나서 살 수 없다고 하니 괜히 조바심이 나서 시시각각 불안함을 덧입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마트마다 화장실 휴지, 각종 세제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 기본 식빵, 아기용품에 여성용품까지 서서히 동이 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이라도 난 듯 미리 '쟁여두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은 더 불안 초조. 우리 곧 아기도 태어나는 데 괜찮을까. 손 세정제가 대수야? 걱정이 산더미가 된 그날 저녁, 태어나기도 전인 아기 기저귀와 분유부터 급하게 주문을 했다. 혹시 상황이 더 심해져서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될까 봐. 주문한 건 3월 초였는데 3월 말에나 배달이 온단다. 심각한 기색이 서서히 밀려들고 있던 미국의 초봄날. 그렇게 봄학기는 스멀스멀 흘러가고 있었다. 학교 갈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무사하게 해 주세요.
(저는 아기도 있다고요.)
봄방학 이후 수업은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됩니다
봄방학 한창이던 어느 날 저녁, 학교로부터 도착한 메일 한통. 임신 후반기, Third trimester에 접어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지고 있던 나였기에 아주 잠깐 동안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학교에 안 가도 되니까. 밖에 안 나가도 되는 거니까.' 임산부도 노약자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 있어 고 위험군에 꼽히곤 하지 않던가. 그 와중에 학교까지 꼬박꼬박 나가야만 했다면 나도 아기도 바이러스 공포 속에서 시달릴 대로 시달렸을 테니까. 일단 학교 안 가도 되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좋긴 좋다. 근데 이게 수업이 되긴 될까.
너무나도 weird 한 시국 속에서
다들 고생이 많구나!
첫 온라인 클래스. 친구들과의 영상통화 같은 수업이 시작됐다. 분위기 머쓱. 각자의 카메라가 켜졌을 뿐인데 말 한마디 떼고 재잘재잘 하기가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잖아! (나도 방송 좀 했던 여자인데!) 카메라 앞에서 다들 서로 수줍은 듯 낯을 가리는 느낌이다. 대신 각자 집의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어찌나 자주 출연을 하던지. 그래도 안 되는 건 없는 21세기에 살고 있던 거였구나. 어릴 적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나 그렸던 화상회의 현장이 진짜 여기에 있네.
토론식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나 의아하기만 했는데 화면 공유 기능을 통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일 수도 있고, 심지어 소그룹끼리만 모여서 자율토론까지 가능하단다. 세상 신기한 기능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메가 0터디와 0투스의 일방향성 동영상 강의에만 익숙했던 86년생 7차 교육과정 세대인 1인은 그저 신기한 화상강의 시스템 기능 하나하나에 매혹당할 뿐.
"아기 낳고 왔구나. 네 아기 좀 보여줘"
결국 출산 직후, 종강 수업까지 참여하고야 말았다. 물론 온라인으로. “출산 2주일 전까지만 수업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미리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양해를 구해뒀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집에 머물고만 있으니 인터넷만 안정적으로 연결된다면 굳이 못 들을 것도 없는 수업이었기에 스스로 욕심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번 학기 어디 끝까지 불태워보도록 하지.
마침 출산을 마친 걸 알고 계신 교수님은 아기를 잠깐 보여줄 수 있겠냐고 귀엽게 조르신다. 무릎에 재워뒀던 아기를 번쩍 높이 들어 대학원 이모 삼촌들에게 차렷! 경례. 내 아들 여기 있다고 자랑했다. 아이코 기특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된 아기, 무릎에 눕혀두고 토닥거리며 대학원 강의 듣기. 유학준비 한창하고 있던 3년 전쯤엔 이 풍경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것. 코로나 시국이 가져다준 유일한 긍정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겠지. 엄마 공부할 때 아기도 꿈뻑꿈뻑 두 눈 크게 트며 응원해주는 상황이란!
Hope you all stay safe and healthy
얼굴 안 본 지 벌써 두 달은 더 된 듯한 대학원 동기들, 그리고 교수님.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을 땐 예외 없이 이 말을 적곤 하는 요즘.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별 일 없길 바란다는 마음을 진심 한 가득 담아서 조심스레 또박또박 적어보는 마무리 메시지. 이젠 Have a wonderful day와 같은 긍정기운 담뿍 담긴 안부 주고받기가 머쓱한 시국이 되어버렸다. 방긋 웃으며 서로의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인사 교환이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다정한 경고가 최선이 된 요즘. 이마저도 참 지겹다. 인사말에도 슬슬 참신함을 덧댈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순간들. 걱정과 불안을 담아 나누는 인사말을 지울 시기, 곁에 바짝 다가올 수나 있을지.
과연 9월 가을학기엔 가능할까. 온라인 강의실이 아닌 현장 강의실에서 유학생 동기들과 함께 눈을 마주치고 안부를 주고받는 것. 너무나 당연하고 소소했지만 지금은 결코 치르지 못하는 의식들. 의식이 부재하니 각자의 정체성마저 흐릿해져서 '미국 유학생'이라는 신분조차 엉성하게 흐트러져가기만 하는 요즘의 순간들. 서로의 소통이 줄어드니 전공 지식도 흐물흐물하게 쪼그라드는 느낌. 여기에 영어 쓸 일마저 대단히 적어져서 언어 능력치도 쇠하는 것 아닐지 조바심 나는 느낌.
뜨겁게 공부만 하러 왔는데 자꾸만 나무늘보가 되어가니 '유학생으로서는’ 참 답답한 미국 생활. (출산 한 달 차 ‘초보 엄마로서는’ 등교하지 않아도 되니 제법 여유가 생겨 좋은 육아 모드.)
보스턴 지역의 일부 대학은 9월 개강까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는가 하면, 가을학기마저 문을 닫을 순 없다며 최대한 현장 강의 개강을 위해 온 힘을 쏟으려 한다는 대학들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불투명하기만 한 어제와 오늘 되시겠다. 미국 유학 라이프, 과연 우리 모두 1월 이전의 풍경처럼 호흡할 수 있을까. 반토막 났던 봄학기, 그 나머지 절반이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을까. 우리 '영어' 좀 제대로 쓰면서 유학 온 기분 좀 다시 느껴보면 안 되겠니? 코로나 시국 속 미국 유학생의 한숨 담아 풀어낸 소소한 5월 단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