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미국맘 성장기 (21)
에어팟 한쪽이 사라졌다. 집에서는 아기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니까 대개 한쪽만 끼곤 한다. 왼쪽 에어팟은 얌전히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데 오른쪽은 도대체 어디 간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분명히 남편이랑 오후 간식을 먹자고 해놓고 부엌까지 얌전히 들고나간 것 같긴 한데 부엌 바닥, 싱크대 밑 면,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고 뒤져봐도 새하얀 이어폰이 보이질 않더라니... 아아, 선물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영영 내 손을 떠나고 마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서 단 하나의 쓰레기도 내다 버리지 말아 달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 간곡히 부탁했다. 혹시라도 쓰레기통에 실수로 섞여 들어가 버리고 말았을까봐. 최후의 순간, 쓰레기통이라도 뒤져보겠다는 심산으로.
설마 내가 사준 거 잃어버린 거야?
그럴 리가
집 어딘가엔 있을 거야
출산과 육아 라이프가 가져다 준 후유증. 나에겐 이런 것들이었다. 남들은 팔목이 시큰시큰하고 허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픈 것들을 꼽던데, 나는 가끔 몸이 못 견디게 시린 것 빼곤 물리적인 진통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대신, 일상 속에서 자꾸 몇 가지 어이없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식. 딱히 '건망증'이라고 명명하긴 싫은데 자꾸 반복되니 어쩔 수 없이 저 세 글자를 내게도 적어서 스스로 경고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건망증의 초기 증상이란 바로 이런 것들. 아기의 분유를 타다가 몇 스푼을 떴는지 순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음. 2스푼 반을 넣어야 하는데 지금 뜨는 게 1스푼 반인가 2스푼 반인가. 딴생각을 하다가 분유를 녹일 때면 나도 모르게 3스푼을 넣기도. 이럴 땐 이미 진작에 의도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최대한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물을 좀 더 부어 농도를 맞추긴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이미 꽤나 자주 깜빡깜빡하고 있다는 것.
이왕 말 나온 김에 웃픈 에피소드 한 개 더. 아기를 간신히 재우고 나서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려고 최대한 우아한 척, 캡슐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두드리며 기다리는데 기분이 싸할 때가 있었다. 무슨 일이었냐고? 커피 머신 밑에 컵을 두질 않았던 것. 커피는 콸콸 나오고 있는데 정작 그 향긋하고 따뜻한 커피를 받아내 줄 그 어떤 존재도 없었던 그 때, 스스로도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육아 힐링을 위해 커피는 마셔야겠고, 정작 야무지게 이런저런 걸 챙길 정신이 없던 나는 단단히 사고를 쳤던 것이었다. 남편도 아기도 쌔근쌔근 쿨쿨 잠들어 있는 새하얀 새벽, 난 내 정신 어디 갔니... 투덜투덜 중얼거리며 새까만 커피로 엉망이 된 커피 머신 주변을 있는 힘껏 닦아내야 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늘 생각한다. 최대한 마음에 꼭 드는 스쿱만 골라골라 얹을 거라고. 딱 2가지 맛만 고를 수 있다면 한 스쿱은 고교시절부터 늘 좋아라 해왔던 '민트초코칩'으로 나머지 한 스쿱은 라즈베리나 레몬, 요거트처럼 상큼하다 못해 때론 시큼털털하기까지 한 맛으로 맛의 밸런스를 맛춰야겠다고 치밀하게 계산하곤 한다.
5달러 남짓의 아이스크림을 위해 참 공들여서 그날의 맛을 조립하고 완성해가며 끝내 만족할 만한 디저트였다고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하는 과정. 때때로 맛의 조합이 어긋난 스쿱을 '아차차' 싶게 얹었을 때 그 잘못된 선택의 여파는 하루를 꼬박 간다. "아, 아까 좀 더 상큼한 저칼로리를 얹었어야 했어. 뭘 믿고 그렇게 느끼한 초코초코를 골랐지? 녹차 맛은 실패가 없는 법인데 여기 녹차맛은 대실패, 대실망이잖아!"
자꾸만 어긋난 맛을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더하는 느낌
육아를 아이스크림에 빗대자면 자꾸만 마음에 안 드는 스쿱을 얹는 모양새다. 24시간 하루라는 그릇 위에 '어긋난' 맛이 자꾸 얹히는 느낌이랄까. 건망증 한 스쿱, 그 위에 또 다른 건망증 한 스쿱. 얹고 싶지 않던 기대 이하, 예상 밖의 맛을 하루 위에 자꾸만 덧대는 모양이라니. 원치 않던 맛이 덩어리 진 채 꿉꿉하게 얹히니 그 아이스크림의 나날들은 좀처럼 흥과 맛이 살지 않는다. 좀 더 야무지고 부지런하고 기민한 엄마가 되어 아기에게 필요한 것도, 엄마인 나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도 '깜빡거림' 없이 잘 챙겼더라면 그 아이스크림은 내 맘에 제법 쏙 들게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엉성하게 여문 피스타치오가 듬성듬성 뒤섞인 초록 빛깔의 맛만큼이나 단정치 못하고, 느끼함 지수 1000을 찍는 버터 피칸 맛만큼이나 그저 과하고 텁텁하다. 먹으면 먹을수록 피곤하고 지치는 맛이라는 이야기. 육아란 그런 것.
건망증 한 스쿱은 되도록 산뜻하게 털어냈으면 좋겠다. 육아에 대한 피로감이나 어쩔 수 없는 수면부족의 일상이 때때로 토핑처럼, 혹은 와플 콘처럼 제거할 수 없는 베이스로 깃들더라도 수십 가지의 맛 가운데서 의지를 다해 총명한 눈빛으로 골라낼 수 있는 '나의 맛'에는 마음에 드는 육아 일상만 담겼으면 하고 바란다. 아기와의 달콤한 아이 컨택에서 언제 먹어도 미소 듬뿍 배는 '스트로베리 치즈 케이크' 맛을 연상하고, 아기와 아빠가 베프처럼 잘 붙어 노는 훈훈한 풍경에서 '민트'와 '초코칩'이 고루고루 친밀하게 섞인 '민트초코칩'을 상상하고 불러낸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일상만 쏙쏙 골라내 내 아이스크림을 완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은 생각이고. 일단 잃어버린 한쪽의 에어팟부터 찾아야지. 최종적으로 찾기까지 약 4박 5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나 보다. 한쪽을 잃어버렸는데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닫기까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데다 (아이코 내 정신 1), 부엌에 가져나간 게 아니라면 방 침대 구석에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 구석구석 뒤지다가도 아기가 앵... 울고 나면 내가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 잊어버리고 말았던 탓 (아이코 내 정신 2). 그러기를 몇 번을 반복했을 무렵, 부엌에서 반갑게 들려오는 남편의 외침. 여보 찾았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에어팟은 결국 고무장갑 안에서 발견되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설거지를 하다가 슬쩍 빼뒀던 에어팟이 데구르르 굴러들어갔던 걸까. 널찍하지도 않은 통로를 타고 어찌 저렇게 잘 안착한 채 숨죽이고 있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지만, 여러 가지 복기와 상상 전에 우선 싱크대 속 장착된 음식물 분쇄기에 떨어지지 않은 걸 감사해야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잃어버린' 아이템들을 영영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자꾸 많은 걸 기억해야겠다고 소박하게 다짐해 보는 하루. 아이스크림에 자꾸 실패한 맛의 스쿱을 올리는 하루하루가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올린 '실수'의 스쿱들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자고 쓰다듬는 오늘의 오후 풍경. 어쨌든 먹다 보면 다음번엔 또 다른 상큼한 맛을 만나게 될 거야. (일단 에어팟을 찾아서 다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