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박사 도전기, 네 번째 이야기
“귀하의 노력은 감사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참 익숙한 통보가 있다.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인생 중요한 순간들에 ‘휙’ 지나가는 메시지들... 어떤 메시지는 며칠 밤, 잠도 못 자게 들뜨게 하지만 대부분의 메시지들은 한순간 ‘멍한’ 기분을 불현듯 던져주고 가슴 저릿한 활자들이 되어 저 깊숙한 곳에 저릿한 상처로 기록되기도 한다. 늘 한국어 버전으로 받는 게 익숙했는데 이번엔 영어로 받았다. We are sorry to inform you that your manuscript has not been accepted for presentation at this summer’s annual conference held virtually. 아, 네네 역시나 이번 텀엔 함께할 수 없게 되었군요. 미 언론학회 (AEJMC)로부터 도착한 거절 레터 한 대목.
나는 왜 은근히 서운한 걸까. 석사 졸업생으로서의 첫 연구 프로젝트. 교수님의 제안과 조언 아래 스스로 연구 하나를 완성해 보는 데 의미를 두고 시작해 본 소박한 미션. 미 언론학회 (AEJMC)에 일명 ‘자기 주도 연구’ 한 편 제출해보기. 박사과정에 진입해 연구자의 길에 접어들기로 마음먹었다면 한번 스스로 연구를 계획하고 주도해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해보는 경험치를 쌓아보라는 게 교수님의 말씀이셨다. 어쩌면 “Accepted” 된다는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이런 메일을 받아 드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시간과 땀을 들여 ‘노력’이라는 걸 했고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제출’이라는 걸 했다면 누구나 ‘기대’를 품게 되기 마련일 테니.
순간, 인생 수많았던 불합격의 순간들이 쓰윽 스쳐갔다. 원하는 대학교의 수시 1학기 면접 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던 열아홉 살의 기억. 참 여러 곳에 원서를 넣고 방송을 시작하려고 애쓰며 불합격의 메시지에 단련이 되어갔던 20대의 기억. 이젠 진짜로 다 된 줄 알았던 지상파 방송사 한 곳 최종 합격 전형에서 ‘똑’ 떨어졌던 서른 남짓의 기억. 어쩌면 최종적으로 무언가에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거절’당했던 메시지가 흔하고 친근하다. 밉고 지겨운데 또 익숙하니 괜찮다.
“귀하의 능력과 발전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다음 기회에 꼭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당연하고 진부하면서도 얄미운 메시지가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돼 있을까. “We believe that although the submission has promise, it needs more work before it is ready for presentation. We hope that you will take the reviewers’ comments and re-work the submission for a future opportunity.” 네네. 제 페이퍼가 가능성도 있고 좀 더 수정하고 보완하면 언젠간 가치를 발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 사이에 곁들여진 말이 적잖이 위안이 된다. 별거 아닌 한마디가 꽤나 힐링이 된다. “We all have experienced having a paper or extended abstract rejected.” 채점자 본인들도, 학회의 모든 사람들도 모두 다 연구보고서가 ‘거절 (rejected)’ 된 경험들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모두 ‘거절’을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그렇다. 우리는 모두 “Rejected”라는 반갑지 않은 글자에 익숙해지면서 살아간다. 불합격, 승인 보류, 거절, 재심사 요구 등등, 한 번에 “합격”과 “승인”이라는 반가운 활자를 마주하기란 참 드물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든, 운이 좋아서든, ‘통과’와 ‘승인’의 희열을 맛보는 순간도 있겠으나 그렇게 만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만날 수는 있지만 적잖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운명의 짝 만나기처럼. 뭐 제아무리 천하무적의 이름난 학계 거물이라고 할 지라도 모든 연구가 다 수락되진 않았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뾰로통해져서 날 섰던 마음이 살짝 두리두리 해지는 듯도 하다. 우리 교수님도 연구 리젝을 경험했을 것이고, 교수로 일하는 내 남편도 부단히 유사 경험치가 있을 것이며, 내가 논문을 제출한 학회의 학회장 님께서도 어쩌면 리젝에 이골이 나신 분일 수도 있다. (아니라면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2021년 봄날, 미 언론학회에 30페이지에 달하는 첫 연구논문을 제1저자가 되어 끝까지 수정, 보충, 완성해 제출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기로 한다......라고 쓰기에 물론 난 여전히 쿨하지 못하다. 이미 3년 전 박사 졸업하고 햇수로 4년 차 교수인 남편에게 이 정도 논문 제출과 학회 발표는 아무 일도 아닐 텐데... 난 첫 논문부터 삐그덕거리며 아무 성과를 내지 못했잖아!!! (서로 전공도 다르고 연차도 다르고 비교 가능한 대상이 아님에도 괜한 심술). 괜히 새초롬해진다. 넌 했고 난 못했어.라는 유치한 심정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불어 심드렁한 걱정 또한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졸업 직후 첫 연구라 최대한 힘 빼고 제출한 첫 연구논문임에도 이 정도 아쉬운 거라면,,, 박사과정에 진입한 뒤 진짜 연구자의 길을 걸어가며 힘 잔뜩 넣어 기대감 뿜뿜 하면서 제출한 논문이 리젝 되면 얼마나 속상할까. 나이가 들면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자동 상승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여전히 거절당할 일들은 무섭고 미리 실망스럽다. 태연해지기가 쉽지 않다.
“We all have experienced
having a paper or extended abstract
rejected.”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콕 박힌 인생 한 구절을 얻은 건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나중에 미 언론학회가 또 다른 내 연구를 받아들여주고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를 주고 저널에 실어준다면, 난 꼭 한 마디를 덧댈 생각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보 연구자 시절, 이 한마디가 의외로 큰 힘이 되었었노라고. 어쩌면 바로 전 편 브런치에서 써 둔 메시지와도 겹치는 영역이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에 대한 안도, 그에 대한 영어 버전이랄까.
유사한 메시지가 연이어 내게 인사이트를 주고 있는 요즘이라면, 30대 중반 여자로 살아가면서 절실히 필요한 마음가짐이 바로 이런 거라고 자연스레 암시하는 것도 같다. “너만 그런 거 아니고 나도 그랬고 우리 다들 그랬어. 그러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던 길 페이스대로 쭉 이어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니 상심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완곡하고 친절한 배려. “누구나 겪는다”는 짧은 말 한마디, 마치 이건 필수 성장과정 중 하나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아서
지도해주신 교수님도 이미 아셨을 것이다. 내 첫 연구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만 이 “Accepted”라는 글자를 받아 들지 못하는 경험 또한 연구자로서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라는 사실을 미리 깨닫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셨을까. 첫 연구가 어디에도 발표되지 못하고 내 랩탑 드라이브 속에 깊이 파묻혀 하등 쓸모없어진다한들, 그 또한 연구자가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하는 경험임을 스스로 체득하게 해 주신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다면 나는 진정 ‘연구가’가 되고 싶은 게 자명한 셈이니, 내 진로에 대한 의지를 다시금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셈.
흔하고 빈번한 ‘거절’을 겪어내고 있지만 나 또한 ‘최종 ‘선택’되고 ‘승인’ 받고 최후의 1인으로 “Accepted” 되어 ‘합격’한 경험들도 적잖이 있지 않던가. 썩 유쾌하지 않은 활자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 속에서 반가운 메시지를 발견하는 날들도 당연히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언제가 되었든 그런 날은 올 것이다. “당신이 제출한 연구의 잠재력을 우리 학회 리뷰어 모두가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여가며 인정했습니다. 당장 발표 준비를 신속히 마치고 여름 학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 표를 예약하세요!” 하하. 너무나 장밋빛 환상인 건가. 아아, 내 첫 연구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아아, 나는 ‘거절’에 좌절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우리 모두는 ‘거절’ 당하는 필수코스를 묵묵히 지나고 있을 뿐인 거니까. “We all have experienced having a paper or extended abstract rej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