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일상기록 -15]
보스턴 정착 5개월차, 휴가 열흘정도 내서 해외 여행을 다녀보거나 운좋게 방송촬영을 위해 해외 출장자로 당첨되어 틈틈이 여행해본 것 말고 진짜로 외국에 '살아보는 경험'은 생전 처음이다. 빨리 졸업하고 얼른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에 22살부터 공채의 산을 넘느라 교환학생도, 어학연수 경험도 해볼 생각을 안했다. 한국에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만 자라난 진정 '우물 안 개구리'. 33년 동안 뼈속까지 익숙했던 내 나라를 벗어나 미국에 나와 살아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습관은 다소 촌스럽다. 어딜가나 '한국화'하기.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 때 자꾸만 한국에서 봤던 과거의 무언가를 찾아내 짝꿍을 만드는 버릇이다. 보스턴 퀸시마켓 근처를 지나다가 "와, 여기 세종문화같지 않아?" 외치고, 찰스강변을 산책하다가 "여기여기말이지, 진짜 한강 잠원지구스럽다"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워워. 진정해 이러다 잠원지구에서처럼 라면 한 판 끓여먹겠다.
아마 스스로를 잘 적응시키 내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 있겠다. 낯선 풍경 속에서 최대한 익숙한 가치를 끌어내 나 자신에게 '안정감'을 쥐어주려는 본능적인 전략. 한국과 시차가 13시간이나 (썸머타임기준) 나는 이곳, 시간도 공간도 참 많이도 달라진 이곳에서 최대한 큰 방황과 혼란을 피해가며 하루를 '무사히' 꾸려가려면 이런 장난스러운 게임은 살짝 유치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끊임없이 내가 친했던 공간들을 떠올리고 '별 다를 것 없다'고 토닥토닥 안심시키기. 언어도 다르고 날씨패턴도 너무 다르고, 그야말로 한국과 너무나 많은 게 다른 '미국' 안에 있지만 잘 찾아보고 사색하면 '닮은 구석'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국과 한국, 절묘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룰 법한 그림들 중 특히 '춘천'과 닮은꼴에 집중해보았다. 태어나서 자라나고 초.중.고. 대학교와 첫직장 시작을 꾸려온 지점은 서울이지만 아나운서 생활을 약 10년 간 이어온 곳은 '춘천'이기에. 20대의 꿈을 이뤄낸 도시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내일에 대한 고민과 꿈에 대한 사색과 결단이 끊임없이 이어진 공간이다보니 고향 못지 않게 애정이 깊다.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이 나는 건가. 보스턴과 춘천은 여러지점에서 묘하게 겹친다. 닮아서 신기했고 종종 반갑다. 인연이지 싶다.
먹방 별미가 있는 도시
춘천에는 닭갈비
보스턴에는 랍스터롤 냠냠
어떤 도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검색창에 '도시이름'을 치고 그 옆에 나란히 '맛집'을 쳐서 검색하기. 어딘가 여행갈 계획을 세울 땐 늘 유명한 맛집이 궁금하고 그곳의 별미부터 찾아보게 되기 마련이다. 많이 먹지 않아서 늘 입이 짧았던 나였음에도 어떤 장소의 현지 음식이라는 것은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제주도에 간다면 제주도 요즘 맛집 추세 변화를 살피고 먹방음식을 찜해두고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미드나 영화에 한번쯤 나왔을 법한 음식점이나 주인공이 애정한 그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하듯이 말이다. 보스턴과 춘천도 마찬가지. 각각의 공간을 대표할 만한 별미가 있다. 현지인도 관광객도 두말할 필요없이 자주 즐기는 그것. 마음먹으면 다른 공간에서 맛을 볼 수야 있지만 유독 이곳이라서 더 특별한 음식들을 보유하고 있다.
춘천하면 두말할 필요없이 닭.갈.비 (feat. 막국수). 그렇다면 보스턴에는? 랍.스.터.롤이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자면 '로브스터롤'이지만 입에 감기 언어의 촉감을 고려해 그냥 랍스터롤로 부르는 걸로. 사실 Boston도 '보스톤'이라고 적는 게 어문규정 원칙상으론 맞다) 사람들의 음식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맛이 다를 수 있고 지역 별미를 꼽는 우선순위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으나 꼭 먹어봐야 할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작년 여름에 보스턴에 여행와서 가장 먼저 시도했던 음식이기도 하므로. 당시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오는 조금 힘든 동선을 감행하느라 살짝 지쳐있었는데 퀸시마켓에서 랍스터롤 먹고 살아났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거 안먹고 보스턴을 지났다면 계속 앓아 누웠을 듯! 항구가 있는 도시이다보니 해산물 특식이 많고 오이스터 바가 눈에 자주 띄는 편이라, 조금만 잘 검색해보면 어디가나 실패하지 않을 '씨푸드_seafood'를 시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핫도그 혹은 햄버거 느낌 나게 빵과 버무려진 랍스터롤은 나와 같은 '빵순이'에게 최적의 음식.
춘천과 닭갈비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끈끈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듯이, 보스턴도 이런 효자 종목 하나 없을 리 만무하지. 닭갈비 없는 춘천은 상상할 수 없지 않는가. 앗, 여기서 잠깐 멈칫. 랍스터롤 없는 보스턴은 너무나 상상 가능한 걸?! 도시를 상징하는 먹거리와 즐길거리가 이것말고도 너무 많은 건 살짝 함정. 그래도 여기서 "이거 안 먹고 가면 서운해" 느낌의 음식을 공유한다는 건 공통점 맞다. 보스턴에 잠시 머문다면 꼭 먹어보기를. 춘천 닭갈비와 막국수 맛집을 초고도 집중력으로 검색해 들러주는 느낌으로다가 발도장 쾅쾅.
마라톤으로 뜨거운 도시
춘천 마라톤 vs 보스턴 마라톤
아나운서 후배가 춘천에 입사하고 난 뒤 '춘천 마라톤' 신청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춘천에 오면 한번쯤 꼭 도전해봐야할 것 같아서요." 이런저런 지역 축제들 많겠지만, 나 역시 2010년 춘천MBC에 처음 시험 보러 가던 길,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닭갈비, 그 다음으로 생각한 건 '마라톤'이었다. 마라톤에 참가해본 적도 없고 운동에 도무지 소질이 없는 나지만 (특히나 달리기는 100m도 22초에 달릴 만큼 심드렁한 기록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를 떠올리자면 한 일간지의 주최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춘천마라톤을 머리 위로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찾아보니 우리나라 3대 마라톤 중 하나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기도 하더라. 매년 가을, 딱 단풍이 예쁜 철에 공지천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회사 당직 출근길에 자주 대회 풍경을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찐한 땀냄새 가득했던 풍경, 참 뜨거웠다. 올해는 10월 27일에 열린다고.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일이 남았다.
보스턴 마라톤은 매년 4월에 열린다. 꽤나 쌀쌀해서 옷깃을 여전히 단단히 여미고 걸어야 했던 4월의 어느 주말, 마라톤이 펼쳐질 트랙과 파이널라인 곳곳을 구경했다. 세계 4대 마라톤 중 하나라고 불릴 만큼, 전 세계 마라톤 애정자들과 관광객들, 현지인들의 시선을 단번에 확 사로잡는 대표적 행사. (물론, 2013년 있었던 상상도 못할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보스턴'하면 이 대회를 떠올리게 된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겠다. 그때의 사건을 다룬 영화가 영화 '스트롱거'라고.)
이러나 저러나 도시를 상징하는 국제적인 행사 그 무언가가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굉장히 흥분가득한 일이다. 대회 일주일 전쯤, 한국의 마라톤 도전자들이 보스턴을 찾아 대회를 준비하는 모습도 SNS를 통해 자주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아나운서 후배가 그러했듯이, 나와 남편도 "그 언젠가 우리도 보스턴 마라톤 한번 나가볼까" 현실가능성 다소 적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보스턴에서 살아봤으면 보스턴 마라톤도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어?" 꿈은 이루어지는 법일까. 혹은 꿈은 그냥 꿈에 있는 편이 나은 것일까. 판단과 결정은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것으로!
공원을 사랑하는 도시
보스턴 커먼 공원 vs 공지천 의암 공원
재작년 뉴욕에 잠깐 여행을 다녀왔을 때 하루 반나절, '센트럴파크'를 마냥마냥 걸었던 기억이 있다. 도심 중앙에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 하나쯤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워낙에 커서 한번에 다 돌아보기 힘들 정도인 뉴욕의 심장부, 센트럴파크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보스턴에도 현지인, 관광객, 그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보스턴 커먼 공원(Boston Common Park)이 있다. 보스턴 관광의 핵심, 프리덤 트레일을 걸어가려할 때 대개 출발지점이 되곤 하는 이곳. 바로 옆에는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이 베프처럼 착 붙어있다. 같은 공원이지만 예쁜 풍경을 나란히 따라걸을 수 있으니 보스턴 거주자들 복받았다. 보스턴 전철 T의 그린라인과 레드라인이 지나는 '파크스트릿_Park Street'역에 내리면 바로 눈앞에 마주할 수 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올림픽공원갈 때 8호선 '몽촌토성'역에 내리는 것과도 비슷하네. 풍경도 제법 유사하다. 여기가 잠실이야, 보스턴이야.
수업이 끝나고 유독 햇살이 너무 예쁜 날엔 무조건 공원으로 나간다. 카페나 도서관, 강의실, 그 어떤 실내에 자리하고 있기가 너무 아까운 날씨엔 아무리 바빠도 늘어지게 광합성을 하고 싶어진다. 공원 나무그늘에 앉아서 연못만 봐도 기분이 나아지고 때론 햇빛 잔뜩 받아서 얼굴을 찡그려야 할 정도로 뜨거워도 감당할 가치가 있다. 걱정 많은 날들의 무게가 차차 덜어지는 느낌. 공원에 앉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따뜻한 공기로 한 가득 채워지는 느낌. 그래서 '멍때리는 작업'마저 결코 공허하지 않은 느낌. 있는 그대로 에너지 한 순간 한 순간을 느끼고 호흡해내는 순간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데 무언가 '살아있는 느낌'을 가져다 주는 생명력 있는 공간이다. 공원의 대단한 힘이란! 눈으로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직접 걷고 앉아보면 알 수 있다.
춘천에서도 공지천을 둘러싼 의암호 근처를 쭉 따라 걸을 때 비슷한 기운을 받았다. 가끔은 회사 주차장까지 올라가지 않고 언덕 아래 차를 세워둔 채 공원길을 따라 쭉 산책을 즐기고 출근하기도 했다. 회사가는 길은 때로 의도치 않은 소풍길 같았고 출근길이라기보단 여행길과 더 닮아있기도 했다. 지구본 내가 서있는 땅의 위치는 정반대 지점이겠으나 시간차가 달라도 어떤 힐링의 공간으로부터 치유받는 느낌만큼은 꼭 닮았네. 보스턴 커먼과 퍼블릭 가든을 가만가만 걸으면서 일 년 전, 삼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전 칠 년 전쯤의 공원산책을 떠올린다. 그렇게 하루를 씻어내고 치유를 덧입던 그시간들을 고스란히 재현해본다.
어마무시한 추위
눈의 공격
강원 영서지역 vs 미 북동부 MA
"설마 춘천만큼은 춥지 않겠지." 강원도 영서지역의 한파를 피할 수 있다면 세상 그 어떤 곳에 살아도 뭐 그럭저럭 괜찮을 거라고 예상했다. 완벽하게 틀렸다. 여기 보스턴, 진짜/엄청/막강/최고 추웠다. 이삿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과감하게 핫팩은 안 넣었는데 한 200번쯤은 후회했다. 5월 초중순까지도 얇은 코트를 벗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미국 북동부 지역의 추위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할는지! 추운 날씨에 남편따라 나갔다가, 너무 추워서 결국 우울감에 난폭해질 뻔 (?) 했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해본다. 글을 쓰는 지금은 드디어 '초여름날'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쌀쌀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 한 여름이 되어도 '막' 덥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날씨란 건 조금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여기, 진짜 추울 땐 너무 춥다.
"춘천의 겨울도 만만치 않았지." 보스턴에서 추위에 고생고생할 때마다 10년의 세월, 그간의 일터를 떠올린다. 근무지역으로만 따지면 군대 생활한 거나 다름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춘천mbc는 춘천, 화천, 철원, 양구, 인제 등 군부대 주둔지역을 커버한다. 종종 한 겨울 겨울축제 현장에 나가 생방송이라도 할 때면 핫팩을 열 개 뜯어 덕지덕지 붙여도 기절할 것처럼 추웠다. 실제로 생방송 마치고 온몸이 딱딱해진 채 피가 돌지 않아서 쇼크가 왔던 적도 있을 정도. 손발 수족냉증은 더더욱이 심해지고 눈이라도 한번 왔다하면 방송시간 맞춰 출근을 못할까봐 걱정돼서 회사에서 자야하려나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도 잦았다. (춘천mbc에서 근무해 본 자라면 다들 끄덕끄덕하고 있을 지점)
한창 연애할 당시에는 현 남편이 된 구 남친이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었다. 연애할 때처럼 따뜻한 지방에 내내 있을 줄 알았는데 운명은 장난스럽기도 하지! 결혼생활을 시작한 신혼집은 메사추세츠 보스턴. "아하, 이래서 결혼과 연애는 다르다고 하는 건가요?" 영서지역의 어마어마한 추위를 자연스레 또 다시 연상케 했던 보스턴의 초강력 한파. 7월 2일, 여기 지금 날씨 딱 좋은데... 이렇게 좀 오래 가주면 좋겠다고 소심하게 바라본다. 2020년으로 넘어가는 한겨울은 또 얼마나 추우려나. 벌써부터 걱정시작. (아아, 어제 브런치 연재글에 '간헐적 걱정'이 필요하다고 그토록 썼건만 결국 또 걱정)
왁자지껄 여행하기 좋은 도시
춘천,
그리고 지금 여기 보스턴
3월의 보스턴과 지금 이순간 7월의 보스턴은 참 많이 다르다. 멀리갈 것도 없이 당장 지난 달과 이번달을 시작한 느낌부터도 다르다. 부쩍 관광객이 늘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커먼 공원의 분위기도 더 왁자지껄해지겠지. 일상을 이어오는 지점과 관광을 시작하는 지점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슬쩍슬쩍 마주하게 되는 한국인의 숫자 역시 늘어난 느낌이다. 지치고 고단한 기색보다는 이색풍경에 들떠있는 여행자들의 낯빛에 덩달아 나도 설렘이 피어날 수 있는 시간들. 신기한 일이다. 그 어떤 정보가 없어도 '여행자'들은 그 기운에서부터 에너지가 담뿍 느껴지니 말이지.
워낙에 넓은 나라, 미국 곳곳 가볼 곳은 많지만 단연 '보스턴'에는 미국 역사의 흔적을 느끼고 배울 장소들이 그득하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경주'스럽다고 표현하던 걸. 그만큼 차분하고 단정한 여행지. 그 안에서 공간 각각의 의미를 마음에 담아보고 또하루쯤은 여행자 특유의 발랄함으로 하버드와 MIT 캠퍼스를 모교인 것마냥 자신만만 행진해봐도 좋겠다. 어딜가나 점점 여행자들의 목소리 톤을 마주할 날이 찾아온 덕분에 거주자마저 여행의 기분을 입고 살아가는 기분.
춘천MBC 출근길, 방송준비하느라 분주할 때 지나던 그 길의 풍경과 그 길을 마음에 담던 내 감정이 닮았다. 스튜디오 안에서 큰 창을 통해 내다보면 낭만여행을 떠나온 자들이 그 모든 풍경에 가득 취해 느긋한 몸짓을 보이곤 했다. 여행자가 자주 찾는 도시에서 일상을 산다는 것. 그들의 흥분감까지도 종종 전염되어오는 듯해서 매력적인 도시. 춘천, 그리고 지금 여기, 보스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