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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명 Oct 23. 2023

01화 세검정 바위의 시간



어떤 공간이든 그곳에는 차곡차곡 지내온 시간이 쌓이기 마련이다. 

지난 주말 봄 마중을 다녀왔던 세검정이 그러했다. 두 발로 즈려밟고 두 손으로 밀어 봐도 꿈쩍하지 않던 바위가 밤낮으로 흐르는 물줄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나 보다. 세검정 아래 넓게 펼쳐진 바위에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홍제천의 물줄기가 바위 표면을 패고, 깎고, 둥그렇게 만들며 마치 자신이 이곳을 이렇게 세차게 흘러갔노라고 흔적을 남겨둔 듯했다. 홍제천 물줄기는 그날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와 함께 졸졸.



세검정 아래 너럭바위 ⓒ 김광명




백사실계곡 옛 정자의 주춧돌에 앉아서 ⓒ 진우석 작가

바위의 시간이 흐르듯이 부모님의 시간도 흘렀을 것이고, 나의 시간 역시 흘러왔다. 작고 조그맣던 내가 어느덧 어엿한 어른이 되어버린 사이에, 엄마와 아빠의 청춘도 홍제천 물줄기처럼 졸졸, 아니 콸콸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흔적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날, 세검정 아래 널따란 바위에 남겨진 여러 형상을 보며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형상의 시간을 남겨 주었는지, 또 나는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남겨지고 싶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신영동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 그리고 엄마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봄 마중 다녀온 이야기를 더 해보자. 

여기저기 꽃 구경에 정신이 없다. 세검정을 지나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오솔길에는 아름드리 감나무와 밤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로 핀 꽃이 있는지 이리저리 둘러봐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문득 ‘꽃은 산속의 달력’이라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 한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꽃은 산속의 달력이요, 바람은 고요 속의 손님일세.
〔花是山中曆, 風爲靜裏賓.〕”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그러니 진짜 달력이 없이도 진달래가 피면 3월이겠고, 철쭉이 피면 3월을 훌쩍 지나 4월쯤 된다는 것을 나도 알겠다. 그렇게 걷다 보니 봄이 오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새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친구들의 맑은 웃음소리.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걸으면 걸을수록 생각이 단순해지고 그러다 문득 어느 곳에 머무르면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이곳 여행작가학교에서 만들고 싶은 ‘나의 시간’이 그날 세검정 아래 바위에서 보았던 흔적 중 가장 고왔던 웅덩이처럼, 아름답고 찬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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