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꿈과 나의 커리어가 일방적인 희생으로 연명하지 않는 관계를 꿈꾼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 직한 상상이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과 사귀면 어떨까? (므흣) 상상만으로 달콤한 꿈이다. 그런데 꿈은 꿈인지라 연예인까지도 아니고 인플루언서와 결혼한 일반인의 마음은 자주 복잡 미묘하다. 유명한 연인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고찰해본다.
ㅣ그늘 좀 치워 줄래?
나의 연인 J는 한국 파쿠르 씬의 살아있는 화석이자 파쿠르 꿈나무들의 초통령이다. 사람이 한 길만 우직하게 파다 보면 실력 못지않게 이런 유명세도 자연스레 생긴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는데 어쨌거나 나름 유명한 연인과 함께하는 삶은 제법 뚜렷한 명암이 있다.
가장 큰 '명'은 관심과 환대이다. J의 옆에 있으면 나는 자연스레 관심을 받는다. J를 몰랐던 사람조차 그의 독특한 이력과 뛰어난 파쿠르 실력을 알게 되면 이내 보통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데 그의 배우자란 이유만으로 그 후광이 내게도 잠시간 드는 것이다. 사실 나는 원체 낯을 가리고 조용한 편인 데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조용히 구석 자리를 찾는 아웃사이더 자질이다. 그래서 가끔은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곤 하는데 유명한 연인 곁에선 얼떨결에 관심을 더 받고 외롭게 부유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애석하게도 가장 큰 '암' 역시 바로 그 후광에서 비롯된다. J와 함께 있으면 나는 곧잘 묻힌다. J가 워낙 캐릭터가 확고하고 개성 있다 보니(a.k.a 파쿠르 장인) 내 존재감은 흩날리다 못해 가끔 괴상한 정체성, 이를테면 '파쿠르 아무개의 아내 아무개' 정도로 세팅되기도 한다. 아 씁쓸하다 씁쓸해. 나도 내 이름이 있고 나름의 색깔이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가끔은 내 친구들마저 J의 소식에 더 기민하고 그를 통해 안부를 전하는 등 소통 채널이 하나 둘 그에게 옮겨가는 걸 볼 때면 묘한 자격지심을 느낀다. 남들이 나를 어찌 기억하든 누구한테 먼저 연락하든 그러려니 넘어가면 되건만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본래의 나보다는 누군가의 나라는 정체성이 더 커지는 게 못해 자존심 상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선언에 가까운 관계 맺음을 하고 나서 좋든 싫든 배우자가 내 삶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이, 아내가 누구인지가 내 삶에 이토록 영향을 끼칠 줄이야. 삶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관 같이 우리 둘 사이에 주고받는 영향력뿐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은 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다. 내 얼굴이 첫 번째 얼굴이라면 배우자의 얼굴은 내가 선택한 나의 또 다른 얼굴 같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를 한 덩어리로 묶어 생각하니까. 그런 까닭에 결혼은 현실적으로 나의 두 번째 얼굴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뭇 신중해진다. 마음 같아선 두 번째 얼굴 따윈 갖고 싶지 않지만 비밀 결혼이면 몰라고 공개 결혼은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름 고안해낸 방법이 연인과의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사회 활동에 있어서 우린 가급적 서로를 노출하는 일을 자제한다. (라고 말하고 <결혼 이야기>를 연재하는 건 예외로 두자.) 그렇게 나마 누군가의 나이기 전에 나 자신이 더 또렷하게 보이기를 바랄 뿐. 이 글을 읽는 친지들도 사랑하는 내 두 번째 얼굴보다 내 첫 번째 얼굴을 더 반겨주길 바란다.
ㅣ너의 꿈 나의 커리어
연인과의 조화로운 인지도만큼이나 우리 두 사람의 꿈과 커리어 밸런스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한다. 결혼을 고민하며 우려했던 부분이 기혼여성, 특히 예비엄마의 기울어진 커리어 운동장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여성으로서 내게 결혼은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노선을 변경한 기분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큰 장애물 없이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던 게 갑자기 국도로 길이 바뀌어 가정이니 육아니 하는 방지턱이 내 커리어의 속도를 낮추고 있었다. 결혼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 커리어만 두고 보면 스펙이 하나 차감되는 듯했는데, 이직이라도 하게 되면 나의 기혼 사실을 꿀리지 않고 어필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혹시 아이라도 갖게 되면 출산 휴가며 육아 휴직이며 여러 아이템을 쓰고서라도 방지턱들을 굳건히 넘어 무난히 커리어 길을 완주할 수 있을지도.
주변의 또래 워킹 맘들을 보면 내 커리어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가는 게 '가능'은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 길이 얼마나 울퉁불퉁할지, 그래서 개인이 감내해야 할 맘고생 몸고생은 어떨지도 가만히 짐작해본다. 이미 앞선 기혼여성들이 많이들, 오래도록 고민한 물음인데도 어째서 2022년을 살아가는 또 한 명의 기혼여성으로서 여전히 이런 두려움을 안고 있을까. 사회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다지만 현실의 불안에 비해서는 여전히 더디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와 J 사이의 커리어 밸런스를 가늠하고 의논하고 일이었다. 우리 둘 다 가정과 육아보다는 자신의 일을 활짝 피우고 입신양명하는데 욕심이 있는지라 우리가 함께 가려면 적당한 서포트 밸런스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J는 자기 사업을 하는 준 프리랜서라 일의 규모와 속도를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처지이다. 나는 현재 직장인이지만 머지않아 J와 같이 독립적인 밥벌이의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하고. 현재 직장과는 별개로 아웃도어 커뮤니티를 만들고 움직임 캠프를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마침 J 또한 파쿠르를 비롯한 자유로운 움직임 모험의 장을 만들고픈 관심사가 비슷해 종종 움직임 클래스와 축제, 공동체 기획을 함께 구상해보곤 한다.
여전히 살짝 기울어진 커리어 운동장이지만 너의 꿈과 나의 커리어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연명하지 않는, 조화로운 관계가 되길 바라본다. 아이가 없는 지금이야 서로가 노력하면 어찌 되겠지 싶다가도 언젠가 아이라도 생기면 그때도 이렇게 평온하고 조화로울 수 있을까? 염려되는 마음이지만 각자의 핸들을 잡고 함께 운전대에 올라보기로. 두 바퀴의 밸런스를 부단히 맞춰 나가는 주변의 선배 부부들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