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 꿈 꿔
내게는 세 개의 생체시계가 있다. 아침 9시 배꼽시계, 저녁 9시 하품시계, 그리고 한가운데의 낮잠 시계다.
낮잠 루틴을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집중력 때문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하다 보면 오후쯤 머리가 멍해진다. 집중 안될 때 쓰는 카드가 몇 개 있다. 밥을 먹으며 쉬거나 산책을 하며 환기를 시키거나, 간식 타임을 가지며 잠시 멍 때리는 식이다. 열심히 카드 돌려 막기를 하고도 두 세시쯤 되면 집중력의 최대 난관에 부닥친다. 그 무엇으로도 집중력 배터리 충전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최후의 보루로 쓰는 카드가 바로 낮잠이다.
사실 낮잠은 필연적인 처방이기도 했다. 지병 없이 대체로 건강한 편이다만 이따금 편두통이 있다. 일을 할 때 집착적으로, 마이크로 매니징하게 모든 걸 챙기려 드는 편이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불안에 기반한 집착이다. 그러다 보니 일할 때 항상 긴장을 많이 한다. 최근에는 거북목 자세까지 심해지며 종종 뒷목 어드메부터 머리께까지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 든다. 전구가 과열되다 못해 퓨즈가 터진 기분이 왕왕 드는데,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은 뇌의 전원을 잠시 꺼버리는 일이다. 슬며시 두통이 올라치면 나는 순순히 낮잠의 세계로 잠시 도망간다.
내 낮잠 루틴이라야 단순하다. 우선 휴대폰 알람을 맞춰 책상을 올려둔다. 잘 듣고 일어날 수 있게 진동이 아닌 쩌렁쩌렁한 소리 알람이다. 그리고 뽀모도로 타이머를 들고 침실로 들어간다. 타이머를 20분으로 맞춰 머리맡에 둔다. 그리고 굿나잇, 아니 굿애프터눈.
나처럼 낮잠을 자주 즐기는 듯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낮잠을 일찍 끝내는 비결이 뭐가 있을까? 낮잠이라기엔 너무나 오래 푹 자버린 경험이 나도 많다. 두통이 사라지기는커녕 머리가 띵할 정도로 뭉개며 자고 일어나서 오는 현타란! 이 숙취 같은 낮잠늦잠을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스킬이 있다.
앞서 말했듯 휴대폰을 거실에 두고 뽀모도로 타이머를 침실에 들고 들어간다. 20분 뒤 머리맡의 타이머가 울리면 능숙하게 알람을 끈다. 그리고 마음속의 선과 악이 대립한다. 일어나야지! 조금만 더 잘까? 당장의 낮잠이 달콤하다 보니 대게 정신은 깼는데 몸은 침대에서 뭉개고 있다. 그럴 때쯤 21분 뒤로 설정해 둔 휴대폰 소리알람이 거실 책상에서 천둥을 치면 그제야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혹은 미팅이나 외부 일정을 가급적 오후로 잡고 시간에 맞춰 일어난다. 줌 미팅이 오후 3시라면 2시 30분쯤 눈을 붙이는 것이다. 회의를 놓칠 순 없으니 20분 자고 애써 잠을 털어낸다. 이 또한 책임감, 자존심, 칭찬과 사회적 인정 등 자신의 캐릭터에 맞는 적절한 당근과 채찍으로 낮잠 타임을 확보하길 추천한다.
이러고도 몸이 영 피곤한 날엔 그냥 더 잔다. 내 몸이 어련히 휴식이 필요한가 보구나. 그리고 그런 날은 대게 밤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날인 경우가 많다. 이렇듯 못다 잔 잠은 언젠가 몰아서 다 갚게 되어있다. 매일의 빚을 갚듯 잘 수 있을 때 충분히 자두자.
하지만 막상 낮잠을 자려고 누우면 처음엔 잠이 안 오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낮잠의 시작은 초조하다. 시간이 가고 있는데! 얼른 자야 하는데! 머피의 법칙처럼 아스라이 잠에 빠지려고 할 때쯤 꼭 그제야 알람이 울린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찰나의 낮잠이라니, 내가 이럴 거면 안 잤지..!
그러다 최근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제는 자려고 누웠을 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한다. 잠을 잔다 생각하지 말고 누워서 잠시 쉰다고 생각하자. 눈을 감고 눈이라도 쉬어주자. 대단히 꿀맛 같은 낮잠을 기대하지 않다 보면 오히려 맘이 편해져서 스르르 잠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딱 그 순간의 선잠이 낮잠의 묘미다.
뇌과학에서 익숙하게들 말하길, 깨어 있는 동안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자는 동안 기억으로 정리된다고 한다. 선잠에 빠진 동안 내 머릿속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휙- 휙- 날아다니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의식도 무의식도 아닌 이 오묘한 각성 상태의 경험이 왜인지 좋다. 물건들이 어질러진 책상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처럼, 막 쌓여있는 일정들을 하나씩 정리할 때처럼, 종일 입력하고 짜내고 자극하느라 바빴던 머릿속이 저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하고 있구나 싶다. 개운하다.
낮잠 얘기를 하려면 밤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하루에 보통 몇 시간쯤 자는지? 하루의 총 수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적정 수면 시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창 입시 공부를 할 때는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는 게 잘하는 건가 싶다가도, 나이가 들수록 더 이상 밤을 새워 벼락치기하는 패턴이 건강은 물론 작업물의 퀄리티면에서도 썩 좋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인생사 마라톤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꾸준히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효과적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하루 8시간은 자려고 한다. 하루 24시간을 일-여가-휴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 24/3=8시간. 단순한 계산이기도 하거니와 신경 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매슈 워커의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책에서 영감을 받은 기준이다. 잠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담은 책인데, 그래서 결론적으로 몇 시간을 자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결론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자신만의 패턴을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말한다. 6시간을 자든 9시간을 자든, 자신이 몇 시간을 잤을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지 스스로 관찰해 보라는 것이다. 수면시간뿐 아니라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날 때 수면의 질이 좋은 지도, 사람마다 개인적인 편차가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리고 이 수면 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생체리듬을 길들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낮잠은 내 두뇌에 주는 일종의 싸인이다.
"자 이제 넌 20분간 낮잠을 잘 거야.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오늘 마지막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게 될 거야. 그것만 끝내면 오늘의 부담은 이제 끝이지. 마음껏 루틴을 하며 남은 하루를 즐기면 돼!"
내 하루가 새벽부터 밤까지 강-강-강-강 일색이라면 사는 게 조금은 덜 재밌을 것 같다. 그보단 어느 때엔 휘몰아쳤다가 어느 순간엔 고요했다가, 또 세차게 흐르다 종국에는 느슨해져 버리는 리듬이 내 하루를 더 다채롭게 만든다. 이 낮잠 후에는 하루의 속도가 좀 더 느긋해질 거라고. 매일의 황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는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