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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하이 Mar 16. 2024

하루 30분, 걸어서 디지털 디톡스

산책과 노와이파이존

  11:30 알람이 울린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바로 산책 타임이다. 


  오전의 중요한 일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대로변까지 이어진 골목길을 쭉 내려간다. 골목에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사거리 야채 가게의 아저씨는 오늘도 부지런히 채소를 손질한다. 그 맞은편의 떡볶이집에서는 어김없이 고소한 오징어튀김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큰길에 다다르면 횡단보도를 건너 상가들이 줄지어 선 대로변을 따라 10분여 걷는다. 매일 거절하는데도 매일 내게 전단지를 나눠주려 애쓰는 아저씨를 오늘도 못 본 체 지나친다. 이윽고 천변에 도착한다. 한낮인데도 천변에는 산책하는 이들이 제법이다. 한강까지 이어진 천변의 세 번째 다리까지 찍고 빙그르 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 집에 돌아오면 꼬박 30분이 걸린다. 


  집에서 일을 하게 되며 하루 30분 산책은 내 일상의 주요한 루틴이 되었다. 내가 어쩌다 산책을 하게 되었지 떠올려보면 산책은 내 삶의 이미 오래된 일상이었다. 


  어릴 때 살던 아파트에는 단지를 길게 둘러싸고 이어진 산책로가 있었다. 주말이면 아빠는 당시 키우던 작은 치와와의 목줄을 메며 내게 산책을 가자고 말했다. 나는 아빠와 그 길을 자주 걸었다. 무뚝뚝한 아빠는 길 위에서 말이 없었다. 아빠를 닮아 무뚝뚝한 내가 주로 혼자 떠들어댔다. 바깥나들이에 잔뜩 신이 난 강아지, 노랗게 파랗게 옷을 갈아입은 가로수들, 쾌청하고 흐리고 선선한 날씨 같은 것들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나는 아빠와 오랜 시간을 걸었다. 

  어릴 땐 그 산책길이 참 평범하고 조금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대체 무슨 재미로 그 어린애와 매주, 그저 걸었을까? 참 단조로운 시간이었건만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그 무수한 산책들부터 퍼뜩 떠오른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순간이 내게 큰 호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뚝뚝한 아빠가 내게 보여준 묵묵한 애정과 관심 덕분일 터인데, 어린 나의 속도를 맞춰주던 아빠의 걸음들을 먹으며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걷기 예찬


  어른이 된 나에게 산책은 내 하루를 조율하는 시간이 되었다. 새벽과 밤의 산책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지만 정오의 외출은 내게 휴식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오전까지 바쁜 일들을 일단락하고 길을 나서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언제가 행복했어?
감사한 순간이 언제였지?


  저녁에 쓰는 감사일기의 질문이기도 하다. 마음이 바빠 쫓기듯 살다가도 산책 길에 오르면 꼭 오늘의 행복과 감사부터 따져본다. 겨우 반나절이 지나는 동안에도 벌써 이만큼 감사한 일이 있음이 감사하다. 

  나는 이 시간이 꼭 바이올린의 현을 조율하는 작업과 같다고 생각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처지는 날이면 길 위에서 가만히 나를 마주해 본다. 종종거리며 종일 바쁘다가도 이 순간만큼은 나의 현재를 바라본다. 사소하더라도 살아있음을 느꼈던 순간을 복기하며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교정한다. 그러다 보면 기분이 너무 처지지도, 너무 널뛰지도 않게 일정 폭에서 조정이 되는데, 위대한 정오의 시간에 걸음으로써 내 하루를 중간 점검한다. 이 잠깐의 여유가 오늘도, 내일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 나는 매일이 든든하다. 


  산책의 좋은 점을 말하라면 끝도 없을 테지만 그중 단연은 걷기이다. 나는 오직 걷기 위해 길을 나선다. 우리는 걷는다는 행위를 대게 도구화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걷는 것이다. 

  반면 걷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걸음에는 힘이 있다. 인간은 본디 동물, 즉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니던가. 움직이는 생명으로서 걷는 인간은 생의 보다 본질적인 질문들에 가닿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생계와는 직접적이지 않은 공상들, 소란스러운 풍경에서 얻는 원초적인 감각들, 발자국마다 쌓이는 머릿속 여백들. 이 모든 무용함이 생의 본질과 꼭 닮았다. 그 점에서 걷기는 생에 온전히 몰입하는 명상과 같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보다도 가볍게 몸을 움직일 때 우리는 더 생생히 비워낸다. 


  걷기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산책길의 3가지를 없앴다. 바로 지갑과 시계, 휴대폰이다.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익숙한 소비를 떠올린다. 달고 짜고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것들을 상상하며 현혹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즉각적인 소비를 통해 순간의 고통을 소거해 버리곤 하는 나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소비로 잠깐 기분이 나아질 뿐 결국 같은 문제는 반복되었다. 이럴 때 지갑이 없으면? 시발비용을 쓸 수가 없다. 대신 천천히 속도를 늦춰 내 진짜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소비하는 대신 관조하는 것도 재밌다. 동네에서 가장 싼 야채가게를 지날 때면 오늘의 야채와 물가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김장배추가 사라진 자리에 봄동과 달래가 올라온 지는 제법 되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잘 몰랐던 계절을 매대의 나물들로 감각한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세상을 천천히 구경한다. 관조하듯 느리게 걷는 발걸음에서 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휴대폰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은 더 많다. 길을 걷다 무언가 궁금해도 퍼뜩 찾아볼 수 없다. 누군가 생각나더라도 당장 카톡을 보낼 수도 없다. 어떤 날은 유난히 멋진 하늘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던 적도 있다. 

  대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걸음을 멈춰 챙겨 온 메모지에 몇 단어 끄적인다. 누군가가 그리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사진 대신 두 눈에 꼭꼭 담으려고 여념 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메신저 앱의 빨간 알람에 정신이 팔릴 일도, 멍하니 화면을 보며 스크롤을 내릴 일도 없다. 주머니 속 작은 기계가 없어지는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여기의 걸음에 집중하게 된다. 휴대폰 없이 하는 산책은 내 걸음의 속도만큼 모든 걸 충분히 느리게 만들어준다. 길 위에서 마주한 것들이 내 안에서 숙성되어감을 느낀다. 신기하게도 이 아날로그 한 속도감에 내게 큰 안정감을 준다.



내 하루의 노와이파이존


  휴대폰 없이 하는 산책과 마찬가지로 내 삶에 인위적으로 오프라인을 고수하는 시간이 있다. 일어난 직후부터 아침 9시까지, 저녁 7시부터 잠이 들 때까지 일명 ‘노와이파이존’이다. 

  원래 침실만은 전자기기가 없는 공간(노와이파이존)으로 만들고 싶은 게 시작이었다. 잠이 들기 직전까지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눈을 뜨고 바라보는 첫 세상마저 검은 화면이라니. 내 의식의 시작과 끝을 온통 도파민에 이끌리는 게 못내 자존심 상했다. 


  도파민에 중독될수록 내 생각의 호흡이 짧아짐을 여실히 느낀다. 할 일이 있어 휴대폰을 켰다가도 할 일은 금세 까먹어버리고 여러 앱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생각은 짧아지고 자극에 쉽게 휩쓸리고. 그렇게 정신이 분산되다 보면 삶의 고통이나 환희와 같은 격정적인 순간에 오롯이 몰입하지 못할까 나는 자주 두려워진다. 

  한낮에 휴대폰 없이 하는 산책이나 4시간 2시간, 아침저녁으로 갖는 노와이파이존은 내게 단절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연결을 선물한다. 이는 여행과 비슷하다. 나는 여행을 할 때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고집스럽게도 유심을 사지 않는 편이다. 무슨 카톡이 왔을까, 인스타에 또 재밌는 릴스가 없나 수시로 궁금한(실제론 궁금하지도 않은) 충동이 올라와도 당장 접속할 수가 없다. 그렇게 디지털 세계의 연결이 차단된 순간 비트 세계의 연결이 열린다. 길을 걷는 사람들, 거리의 소란스러움과 하루하루의 계절이 그제야 보인다. 일상이 지루해 On-line으로 도피하던 게, 이제는 너무도 만연해져 버린 line에서 Off 될수록 오히려 큰 해방감을 느낀다. 여행이 아주 긴 산책이 된다.


  새벽의 알람을 굳이 거실에 둔 것도 그런 이유다. 자는 동안이라도 내 곁에 전자기기는 최소화하고 싶었다. 대신 누워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책을 올려둔다. 그 옆엔 메모지와 펜을 둔다.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나 까먹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적어두기 위함이다. 일어난 직후에도 sns부터 접속하지 않는다. 차를 우리고 글을 쓴다. 어쩌다 도파민의 유혹에 빠지더라도 답장이나 반응은 아침을 먹는 9시에 몰아서 한다.


  사실 이 노와이파이존은 내 여러 루틴 중에서도 특히 잘 지켜지지 않는 습관이다. 지금도 세문장클럽에 글을 올리고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핑계로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21세기에 발맞춰 살아가기 위해 우린 영영 기계를 멀리할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하루를 꾸리기 위해서라도 기기와 온라인을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만 하루 중 잠시간이나마 물밀듯 들어오는 외부의 자극과 도파민 파티에 휩쓸리지 않고자 애쓸 뿐. 이 짧은 단절만으로도 나는 꾸준히 생에 접속한다. 내가 삶의 한가운데에 살아가고 있음을 주기적으로 감각한다. 


   3월이 되고 봄기운이 완연하다. 밖에 나서기만 했을 뿐인데도 한껏 설레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우리 삶도 봄과 같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off 해본다. 봄을 맞으러, 우리 걸으러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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